마닐라의 파식강을 지나는 다리 중 하나인 안토니오 루나 다리(Antonio Luna Memorial Bridge)에 도착하기 전에 졸리비를 지나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국마트를 하나 볼 수 있다. 한국인을 상대로 다양한 식재료를 파는 대형 한인슈퍼가 아니라 필리핀인을 대상으로 주로 라면과 과자, 아이스크림 따위를 파는 작은 규모의 코리안 마트이다. 코로나19 기간 중 필리핀에서 한국 드라마가 그야말로 대히트를 쳤고, 그 뒤 이런 컨셉의 한국마트가 마닐라에 우후죽순 많이 생겼는데 듣자 하니 큰돈은 못 벌어도 생활비 정도는 번다고 한다. 마닐라 여기저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라서 가게 자체는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유독 이 한국마트가 내 시선을 끈 것은 간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한국마트는 한글인 듯하면서도 영어 같고, 영어 같으면서도 한글 같은 도무지 읽기 어려운 간판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옮겨 적으려고 애를 써보면 'M는okja' 정도로 옮겨 적을 수 있겠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나로서는 간판에 적힌 두 번째 글자가 'ㄴ' 아래 'ㄷ'을 더한 것인지 아니면 '는'이라고 적어 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주변은 차가 많이 막히는 터라 가게 앞에서 차가 멈출 때마다 유심히 보았지만 도무지 간판의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다.
한가로웠던 어느 날, 나른함으로 뒤덮인 파테로스의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메로나나 하나 사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마닐라 어딜 가도 메로나이니 붕어싸만코와 같은 한국 아이스크림을 쉽게 살 수 있지만, 그냥 먹으면 재미가 없다. 나는 재빨리 파식시티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스마일 하라는 '폭탄 미용실'을 지나서 파테로스의 좁은 골목을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슈퍼에 도착했다.
슈퍼에 도착한 김에 다시 간판을 자세히 보았지만, 찬찬히 다시 봐도 도무지 뭐라고 읽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슈퍼에 들어가서 대뜸 간판 이름부터 물으면 슈퍼 주인이 그런 귀한 정보를 내게 줄 리가 없다. 곧 정답을 알 수 있게 되어 설레는 마음을 감춘 뒤 침착하게 메로나부터 하나 사고, 가게에 놓인 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최대한 천천히 아껴 먹으면서 슬그머니 대체 너희 가게 간판은 어떻게 읽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슈퍼 간판에 적힌 'M는okja'가 실상 'Meokja'였음을 깨달았다. 한국 드라마를 좀 즐겨 보는 주인이 한국 슈퍼를 내면서 가게 이름을 "먹자"라고 지은 것이다. 재밌게도 필리핀 사람에게는 'ㄴ' 아래 'ㄷ'을 더한 글자가 대문자 E로 보일 수 있는 모양이다.
[마닐라 산책] 폭탄 미용실과 'M는okja'라는 이름의 한국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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