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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여행하기/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싸봉(닭싸움)과 아사도



벌써 9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2012년 당시 필리핀 관광부(DOT)에서는 <당신이 몰랐던 재미와 만나다, 필리핀>이란 슬로건을 내세우고 관광객 유치 캠페인을 활발하게 펼쳤다. <WOW Philippines> 대신 <It’s More Fun in the Philippines>이란 슬로건을 사용해서는 아니겠지만, 그해 필리핀에서는 한국인 방문객 100만 명을 달성하고,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여 마닐라공항을 백만 번째 방문한 여행객에게 선물을 증정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필리핀 관광부 사이트를 들어가면 로고에 <It’s More Fun in the Philippines>이라고 적힌 글씨를 볼 수 있는데, 지속 가능한 여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It's "still" more fun in the Philippines>이라고 적기도 한다. 필리핀에서 색다른 것을 보게 될 때마다 필리핀 관광부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슬로건 하나는 참 잘 정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달력에 0과 2밖에 보이지 않는 2020년 2월 22일이었다. 토요일이라고 그런지 인트라무로스에는 사람이 잔뜩이었는데, 다들 사진 배경을 찾아 인트라무로스에 오는 것인지 좀 괜찮은 장소마다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트라무로스는 좀 조용하고 한적한 것이 매력인데, 이래서야 '한가로운 인트라무로스 산책'이 될 리가 없다. 복잡한 거리를 피해 뒷길을 걷다가 길가에 아저씨 둘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가 내린 지 오래되어 그런지 거리에는 오물 냄새가 흘렀지만, 냄새란 계속 맡으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동네 가득 오물 냄새가 연하게 깔려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 둘이 진지하게 앉아서 닭을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닭을 토막 내는 일 자체는 특별하지 않지만, 닭 색깔이 여느 닭과 좀 달랐다. 산티아고 요새(Port Santiago)의 야간개장이 시작되려면 아직 긴긴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나는 발걸음을 멈춰서 아저씨 하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궁금증 해소에 나섰다.


"이 닭은 왜 색이 이래요?"

"싸봉(Sabong)했던 닭이라서 그래!"

"이긴 거예요?"

"아이고, 물론 아니지!"


그러니까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닭은 싸봉(닭싸움)에서 진 닭이었다. 필리핀에서 싸봉은 닭의 왼쪽 다리 부분에 날카로운 칼을 매어두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칼 때문에 싸봉 경기는 으레 한쪽의 죽음으로 끝이 나곤 한다. 심판관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승패가 바로 갈리는 경우도 빈번해서 허탈할 때도 있지만, 필리핀 사람들의 싸봉에 대한 사랑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기실 인기가 어찌나 좋은지, SMX 컨벤션 센터에서 싸봉 엑스포가 열릴 정도이다. 필리핀에서 싸봉이 인기인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 자체가 가진 희열도 있겠지만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적게는 몇백 페소, 많게는 몇천 페소까지 걸려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 탐욕으로 번들댈 수밖에 없다. 노름에 눈이 멀어 당장 집에 쌀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닭싸움에 힘들게 번 돈을 모두 쏟아붓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지만, 한번 재미를 들이면 끊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긴, 마젤란과 함께 항해했던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가 쓴 항해일지를 보면 필리핀 원주민들이 싸봉을 즐긴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대농장에서 일하던 소작인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싸봉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찰나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닭이 아저씨의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있었다. 이렇게 잘게 토막을 내서 대체 무엇을 해 먹는 것일까 싶어 아도보(Adobo)라도 해 드시냐고 여쭤보니, 간장을 넣고 아사도(Asado Manok)를 할 계획이라고 알려준다. 경기에서 이겼으면 닭 전용 샴푸로 목욕을 하고 사랑받았을 터인데, 잠깐 싸움에서 졌다고 바로 요리 재료가 되다니 닭의 삶도 쉽지는 않구나 싶었다.  




▲ 필리핀 마닐라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  Barangay 658 바랑가이홀(Barangay Hall). 



▲  닭을 토막 내는 일에 불과한데 이렇게 진지할 수가 없다. 



닭 사진을 찍어놓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아저씨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나보고 북한에서 왔느냐고 해서 그건 아니라고 했더니 좀 아쉬워하셨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요즘 필리핀에서 아주 인기라서 그런 것 같았다. 




▲  싸봉 닭이라서 그런지 색깔이 좀 독특하다.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싸봉(닭싸움)과 아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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