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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여행하기/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밸런타인데이와 자전거 산책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내게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좀 있다. 하지만 '하고 싶다'와 '할 수 있다'는 그 간격이 너무 멀다. 욕심을 낸다고 해서 잘 되는 일이 아님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욕심만 앞선다. 안타까운 것은 내가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멋진 글을 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촐한 잡문에 불과할 것을 쓸 뿐이건만, 재주가 없는 탓에 간단한 글쓰기도 힘들어한다. 가끔은 적절한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서 온종일 고민에 빠질 때도 있다. 머리가 극도로 뒤숭숭해지면 간혹 무얼 쓰고 있었는지조차 잊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 오면 해결 방법이 없다. 정지 버튼을 누르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모든 노래가 소음처럼 들리고, 가벼운 단어의 배열조차 쉽지 않았던 며칠간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정리하고 집 청소를 했다.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무언가 소유하는 것을 꺼렸던 편이라 정리할 물건이라고 해도 그 양이 많지 않지만, 살다 보면 불필요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쓰고 있던 글이 한 줄도 더 길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집안은 점점 깨끗해져만 갔다. 하지만 모니터 뒤쪽에 붙어 있던 먼지까지 말끔하게 닦아낸다고 내 머릿속이 말끔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전 내내 멍청한 얼굴로 누워서 1895년에 영국 소설가가 썼다는 <타임 머신>이란 제목의 소설을 읽다가 머리를 매우 공들여서 감고 손톱을 짧게 다듬은 뒤 외출 준비를 했다. 무언가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머리가 뒤숭숭한 날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으니, 지도를 펼쳐놓고 한참 고민을 하다가 만달루용 쪽에 가서 점심을 먹고, 산후안 강에 가서 스카이웨이 공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보고 오기로 했다. 


밸런타인데이라고 마닐라의 시내 거리가 알록달록한 사랑으로 넘치고 있었다. 조간신문에서 꽃가게에서 마스크와 소독약 등을 넣어 만든 안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꽃다발이 등장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나서 혹 볼 수 있을까 유심히 보았지만, 평범한 꽃과 풍선만 가득했다. 방역 물품은 로맨틱하지 않으니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꽃다발 가격이 비싼데, 마스크 등을 넣으면 가격이 더 비싸지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밸런타인데이라는 날은 내게 있어 2월 15일 또는 2월 16일과 같았다. 마음이 늙어서인지 풍선을 살 돈이 있다면 귤이라도 하나 더 사 먹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터라 2월 14일이라고 무엇을 받을 일도 혹은 줄 일도 없다.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에게 2월 14일은 상당히 의미 있는 날이다. 딱히 핑계가 없어도 쇼핑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필리핀 사람들인데, 무슨 무슨 날이란 이름이 붙은 날을 그냥 보낼 리가 없다. 그래서 다른 일도 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밸런타인데이도 열심히 즐긴다. 기업 상술에 놀아난다는 식의 비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밸런타인데이의 유래가 어떻게 되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어 보이지만, 연인에게 선물을 주는 날로 인식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한국과 다른 것은 밸런타인데이를 '여성이 초콜릿을 통해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주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주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꽃다발이니 초콜릿, 하다못해 풍선이라도 사서 선물한다. 그리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밸런타인데이에 무엇을 받고, 무엇을 먹었는지 소상히 기록한다. 농담으로 밸런타인 베이비를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실제 러브호텔이 대기실까지 꽉 차기도 한단다. 아이러니한 것은 2월 13일이 에이즈 보건재단이 지정한 '세계 콘돔의 날'이라 전날 콘돔 사용법에 대한 신문 기사를 잔뜩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 얼마나 많은 발렌타인 베이비가 있을지 모르지만, 한가득 꽃다발을 들고 설레는 얼굴로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는 일은 썩 즐거웠다. 만달루용을 지나 산타메사까지 한 바퀴 돌고 거친 숨을 내쉬면서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마닐라 시내에서 20km 정도 자전거를 타면, 부질없는 고민들이 모두 하찮게 여겨진다.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눕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 마스크와 함께 하는 밸런타인데이는 올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Carmona Sports Complex






▲ P. Domingo 거리 



▲ 색이 예뻐서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꽃이 좋아지는 것은 젊음의 꽃이 사라져가고 있어서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꼬꼬마 어린이였을 때도 꽃 보기는 즐거웠다. 




▲ 연두색 지프니. 연두색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뚜렷한 목적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은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일에도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 Lambingan Bridge




▲ Puregold Kalentong



▲ 근사한 아버지표 하굣길 




▲ 만달루용(Mandaluyong City)





▲ 만달루용의 Marketplace Shopping Mall





▲ 호세 리잘 대학교(José Rizal University) 앞에도 꽃 파는 아주머니가 잔뜩 보였다. 



▲ SM Hypermarket. 지도를 보지 않고 대충 짐작되는 길로 가면, 이렇게 쓸데없이 빙 돌고 돌아서 가게 된다. 




찰리 완톤 스폐셜(Charlie Wanton Special)에 가서 마미(mami) 국수를 먹었다. 



▲ 산후안시티 입구 




▲ Sevilla Bridge. 다리 근처에 가서 스카이웨이가 어떻게 되고 있나 보고 있으면, 동네 아저씨들이 수상하게 쳐다본다. 




▲ 산타 메사로 가는 길 




▲ LRT V. Mapa station. 브이마파는 미국 식민지 시절 대법원장이었던 Victorino Montano Mapa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 꽃과 러브호텔. 






▲ LRT Pureza station 




▲ 메이닐라드워터(Maynilad Water Services Inc.)의 멋진 수도관  



▲ 필리핀 사람들의 케이팝 사랑은 대단하다. 모모랜드 팬들이 이 지상철 랩핑 광고를 하려고 과연 얼마나 돈을 썼을지 궁금하지만 알 방법이 없다. 




▲ Mabini Bridge로 가는 길 



▲ 필리핀 국립식량청(National Food Authority) 



▲ 힘들어서 그만 집으로 가기로 했다. 



▲ 필리핀에는 재주 좋은 사람이 많다. 삽을 어떻게 자전거에 끼웠는지 모르겠다. 




▲ 꽃 사세요! 



[필리핀 마닐라] 밸런타인데이와 자전거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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