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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여행하기/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꽈리고추와 멸치



나는 이색 퓨전 요리도 잘 먹는 편이지만, 내가 요리할 때만큼은 절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내 손가락을 거쳐서 그럴싸한 퓨전 음식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요리학원에서 배웠던 것을 벗어나 색다른 재료를 넣어볼 생각은 감히 하지 않는다. 라면을 끓여도 포장지 조리예시에 적힌 것을 정확히 따르려고 노력하는 내게 꽈리고추 한 봉지는 꽤 버거운 존재였다. 


제주상회의 배달하는 꾸야가 덤이라면서 건네준 비닐봉지에는 녹색의 꽈리고추가 가득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시장 가기가 어려워진 요즘과 같은 시기에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봉지를 펼치니 풀 냄새 비슷한 향긋한 냄새가 가득 느껴진다. 하지만 대체 이 쭈글쭈글한 풋고추를 어떻게 먹어야만 한단 말인가? 5페소나 10페소 동전을 내밀고 고추 대여섯 개를 집어오는 정도가 고작인 내게 한 봉지 가득한 꽈리고추는 큰 숙제처럼 느껴졌다. 외출이 가능할 때라면 밖에 들고 나가서 나눠 먹겠지만, 요즘과 같은 때 고추를 들고 길바닥을 서성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런 귀한 식자재를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으니 무언가 만들어야만 했다. 문득 예전에 불라칸의 롤롬보이 성당 수녀님이 알려주신 고추 요리법이 떠올랐지만, 멸치를 한 줌 넣어야만 맛있다고 하셨었다. 그런데 내게 멸치가 있을리가 없다. 언제 마지막으로 멸치를 손에 넣어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것이다. 그러나 없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일과 비슷하다. 상황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아쉬움 따위는 던져버리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살라던 옛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라 열심히 꽈리고추 요리법을 검색한 뒤 장아찌라는 것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장아찌에 필요한 부재료는 간단했다. 간장과 식초, 설탕, 물 그리고 인내력이다. 이제서야 깨달은 바이지만, 꽈리고추라는 것은 사람의 손을 제법 많이 필요로 하는 식자재였다. 간장 따위는 한 방울도 꺼내지 않았는데 꼭지를 따고, 지저분한 부분을 떼어내는 것만으로도 좀 지쳐버렸다. 다행히 고추를 씻은 뒤 물기를 말려야만 장아찌를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물기가 말라야 한다는 것을 핑계로 잠깐 쉬기로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고추 장아찌가 맛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하루가 재빨리 지나갔다. 고마운 일이다. 


- 코로나19로 인한 루손섬 지역사회 봉쇄‧격리조치 19일째



[필리핀 마닐라 생활] 꽈리고추와 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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