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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왕송천 씨가 고물상에서 고물을 파는 이유

by 필인러브 201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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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송천 씨는 왜 내가 트럭 위에 올라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내가 트럭 위에 올라가 보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한다. 쓰레기 더미가 울퉁불퉁하여서 잘못하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수 있는데, 단단한 물건 위에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는 이유이다. 트럭 위의 풍경을 보고 싶다고 졸라봤지만 어림도 없다는 얼굴이다. 내가 다치면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난다는 이야기까지 하니 아쉽지만, 트럭 위에 올라가는 일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물상 가운데 서서 아저씨들에게 요즘 고물 시세가 많이 떨어졌다는 것에 대한 심도 있는 하소연을 들었다. 아저씨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는 카툰(kartun)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1㎏에 5페소였는데, 요즘은 2페소로 확 줄었다는 것이다. 대체 카툰이 뭔데 그렇게까지 심하게 가격이 내려갔을까 싶어서 슬그머니 이야기를 끊고 카툰의 정체에 관해 물어보니, 바보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카툰이 뭔지도 모르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인디언 아저씨가 가장 먼저 사태 파악을 했다.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우리 집에서 왔다고 했더니, 퍽 당황을 하면서 자신이 꼭 인디언처럼 생기지 않았느냐고 하며 친한 척을 해왔던 아저씨이다. 이 아저씨가 한국인은 카툰이 뭔지 모를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고, 내게 카툰은 종이상자와 같은 파지를 뜻한다고 알려주었다. 1㎏ 단위로 돈을 받는데 시박(CBAK)은 12페소이고, 페트병(PET)은 10페소이니 페트병보다는 시박을 줍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도 해준다. 최고는 알루미늄이지만, 알루미늄은 운이 좋아야만 주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시박은 잡다한 플라스틱을 뜻한다) 


왕송천 씨는 저장강박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필리핀에도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1번으로 출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저장강박증은 심각했다. 파사이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쓰레기를 죄다 주워오는데, 그 물건을 그대로 쌓아두고 방치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는 3층짜리 건물을 가진 어머니가 있었고, 그 건물은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상업적인 용도로 활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완벽히 포기한 상태였다. 3층 끝쪽에 죽은 남편이 쓰던 작은 방이 있는데 그 방 안에만 쓰레기를 끌고 가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덕분에 이미 건물 3층까지 쓰레기로 가득했지만, 물건을 정리하거나 버리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페트병과 종이 등을 어깨에 짊어지고 고물상에 가져다가 파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워낙 많아서 그런지 그 정도로는 물건이 줄어드는 티도 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골치가 아팠지만, 조금이라도 물건을 버리면 크게 역정을 내니 이러지도 혹은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장강박증은 스스로 좋아지는 일이 없는 질병이라고 하는데 정신과에 가거나 약물치료라도 받게 하면 좋겠지만 그건 내 마음일 뿐이고, 왕송천 씨는 몇 년째 쓰레기 문제로 가족과 싸우고 있었다. 쓰레기 수집은 확실히 문제였다. 일단 내가 앉을 틈도 없이 계단까지 물건이 가득 차곤 했다. 계단까지 쓰레기로 가득해서 올라갈 수도 없을 지경이 된 것은 참는다고 해도 더운 오후면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클라란 시장에서 파는 바퀴벌레약은 제법 효과가 좋았지만, 바퀴벌레도 가득했다. 가끔 밤에 왕완딩 씨가 몰래 쓰레기를 내다 버리기도 했지만, 들키지 않게끔 조심해야 했다. 흐리멍덩해 보이는 왕송천 씨이지만, 자신의 귀한 쓰레기가 사라지는 것만큼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화를 냈다. 종일 걸어 다니며 힘들게 주워온 것인데 말도 없이 가져다 버렸으니 짜증이 나기도 할 터였다. 그래서 왕송천 씨와 왕완딩 씨가 싸우면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해야 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재판관 노릇을 피하고 있다. 왕완딩 씨가 "오빠는 완전히 미친 거 같아!"라고 하소연을 하면 고개를 끄덕여 주기는 했지만, 내심 결점 하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왕송천 씨는 내 망가진 우산을 슬그머니 고쳐다 주었을 정도로 제법 손재주가 있고, 내가 짐을 들고 있으면 달려와서 기꺼이 들어주기도 했다. 걸레가 먹지보다 시커멓기는 했지만, 내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걸레로 닦은 의자를 주기도 했으니, 우리는 사이가 꽤 좋았다. 거의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하여  왕완딩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내가 왕송천 씨가 주워온 쓰레기 옆에서 생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서 그렇게 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왜 네가 오늘 고물상에 갔는지 알아!"

"왜 갔는데?"

"그 돈 가지고 엠페라도(EMPERADOR) 술 사려고 그러지? 그 술 한 병 사면 며칠이나 먹어?"

"가만 보자. 이틀은 먹지!"

"오늘은 수요일이야. 금요일에는 술 먹지 마! 응?"


왕송천 씨가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모았다는 플라스틱은 고물상에서 60페소에 팔렸다. 그 60페소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좀 행복해 보였다. 좀 의외이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예의를 따지는 사람이 왕송천 씨였다. 그래서 나를 고물상에 데리고 간 것은 좀 부끄러웠지만, 고물상 친구들에게 한국인 친구도 있음을 이야기하는 일은 퍽 즐거웠던 모양이다. 나는 웃는 그를 보면서 금요일에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왕송천 씨에게 가게를 맡기고 왕완딩 씨와 나들이를 하러 가려고 계획하고 있어서 내게 이 문제는 좀 중요한 문제였는데, 의외로 매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금요일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있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얼마 전 가져다준 막걸리 한 병이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이었다. 










아저씨가 팬티를 외출복처럼 사용하신다고 하여 외출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대체 이건 무슨 재주인 것인지 상자로 만든 선반에서 비닐봉투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신기한 재주이다. 



▲  마닐라에는 골목 구석구석 고물상이 대단히 많다. 




▲  왕송천 씨의 수집품이 계단을 꽉  채웠다. 몇 년 째 알고 있지만, 위층에는 딱 두 번 들어가봤다. 요즘은 입구가 거의 완전히 막혀서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다.  



▲ 왕송천 씨는 건물을 통째로 쓰레기로 채워놓고, 왕완딩씨는 그 쓰레기를 피해 1층 구석에 자그마한 가판대를 만들어 놓고 신문이며 담배를 판다. 사진 속의 종이는 외상 장부이다. 



▲ 점심은 20페소 국수이다. 별맛은 없지만 먹으면 배는 부르다. 



▲ 필리핀 마닐라 파사이. 고물상 



▲ 파지가 그야말로 가득이다. 




▲ 고물의 무게를 재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다. 잠깐이지만 모두 심각해진다.  



▲ 요즘 마닐라 고물상의 고물 요금표. 바칼은 고철을 말한다. 100PATAAS 는 고철을 아주 많이 가지고 가면 0.5페소 가격을 더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저렇게 어깨에 가득 페트병을 메고 가면 60페소(한국 돈으로 약 1,400원)를 벌 수 있다.  



▲ 왕송천 씨가 원래부터 못생긴 아저씨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래된 여권 속에서 그는 매우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잔인하기도 하여, 그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언젠가 한 번 함께 건물 안에 들어가려고 가드에게 신분증 대신 이 여권을 맡겼는데 동일인이 아니라고 거절당한 적도 있다. 그때 둘이서 얼마나 깔깔 웃었는지, 배가 아파서 잠깐 자리에 앉아 쉬었어야 했을 정도이다.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왕송천 씨가 고물상에서 고물을 파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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