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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여행] 산타 아나와 770번 바랑가이

by 필인러브 2019.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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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잘대는 바람이 골목 끝에서 끝까지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 덕분인지 오후의 햇살 덕분인지 골목 안을 장식해 둔 깃발이 꽤 아름다워 보이는 오후였다. 한 줌의 비닐로 만들었을 초라한 장식이지만, 하염없이 펄럭이며 제할 도리를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일까 내 도리를 찾지 못한 나는 그 풍경이 좋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이나 골목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그 풍경 속에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했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어릴 적부터 습관이지만,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면 꼭 그 동네 지도를 그려놓곤 했다. 하지만 내 동네 지도는 펜을 들고 종이에 그리는 지도가 아니다.  그저 내 마음속에 그리는 지도이다. 그러니까 어디에 가면 싱싱한 계란과 폭신한 빵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그 동네의 지도를 그리게 되는 과정이 된다. 직접적으로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자신만의 동네 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람 성격에 따라, 혹은 거주하는 기간에 따라 매우 꼼꼼한 지도를 가진 이도 있고, 대충 성글게 그려진 지도를 가진 이도 있겠지만 지도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란 드물다. 나는 전자에 속하는 유형의 인간이라서 그 누구보다 꼼꼼하게 지도를 그리는데,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살펴보느냐고 꽤 오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소중한 것은 그러는 와중에 동네와 친해지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시작하는 이 작업은 시장 안에 단골집을 만들면서 서서히 끝난다.  그러니까 이 지도 그리기는 순전히 내 흥미의 지속력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이 달라진다. 그리고 마닐라의 경우는 다른 어떤 곳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 초록색 담장 옆 구멍가게에서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되던 그 어느 날, 나는 마닐라에서의 내 지도 그리기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마닐라 생활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마닐라 곳곳을 돌아다녔다. 동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마닐라 곳곳을 알지 못하면 무언가 큰일이라도 나는 듯 부지런히 마닐라를 쏘다녔다.  간혹 지도를 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방인의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골목길 풍경이 눈에 익고, 풍경 속의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서서히 지도가 완성되면 골목길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그 애정은 쉽게 식지 않는다.


한참이란 시간이 걸린 나의 동네 지도에 따르면, 메트로 마닐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파코 역 주변 동네이다. 마카티의 산 안토니오 빌리지 쪽도 좋아하고, 리베르타드 역 주변도 좋아하는데, 공통점은 그냥 평범한 동네의 골목길이라는 점이다.  보니파시오처럼 번쩍번쩍하는 동네도 아니고 말라테와 인트라무로스처럼 무언가 크게 볼거리가 있는 동네도 아니다.  오후 햇살에 물기가 말라가는 빨래가 주르륵 걸려 있는 사람 사는 동네일 뿐, 무언가 이런 것이 있다고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내게 마닐라에서의 마지막 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산타아나(Sta. Ana)에서 770번 바랑가이(Barangay)를 지나 파코 시장 주변까지 한 바퀴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770번 바랑가이 바로 옆으로 왜 782번이 아닌 783번 바랑가이가 있을까 궁금해하였던 몇 년 전 그날처럼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나면  동네 재래시장에 들러 모퉁이 과일 좌판 소년에게 10페소짜리 귤을 5개 정도 팔아주고, 그 귤을 우물우물 먹으면서 나의 지도 속 마닐라는 참으로 나에게 적합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 필리핀 마닐라. 산타 아나의 성당. 이 성당은 Our Lady of the Abandoned Parish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필리핀에서는 사거리에서 서서 어디로 갈지 망설이고 있는 와중에도 사진 모델을 구할 수 있다. 




  지도상에서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하지 못하겠지만, 자전거를 타면 바로 가볼 수 있는 동네이다.




▲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주인 아저씨가 사라진 뒤 개 눈빛이 애처로워졌다. 





▲ 내가 사랑하는 풍경 





  도레미 어여쁘게 줄 서 있는 트라이시클 





▲ 내가 세탁기 없는 삶을 십 년 가까이 살고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햇살에 빨래가 잘 말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다. 




▲ 마카티 다고노이 재래시장(Dagonoy Market). 예전에는 이 주변이 무척이나 번화한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지만 다 옛날 이야기이다. 바로 근처에 빈민가가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가면서 오면서 하루에 귤을 두 번 사면 이런 환영을 받을 수 있다. 





[필리핀 마닐라 여행] 산타 아나와 770번 바랑가이

- 2019년 7월, 필리핀 마닐라, written by Saling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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