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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하며 생활하기/메트로 마닐라

[마닐라 생활]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베트남 슈퍼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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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마카티 Chino Roces Ave. 차만 많을 뿐, 거리는 한산했다. 

 

"8시부터 사람이 없기에 일찍 가게 문을 닫았어."
나의 냉장고 사정을 걱정해주는 유일한 친구, 왕완딩 씨에게 통금 소식을 들었느냐고 연락이 왔다. 다음 주부터 또 통행 금지가 시행된다고 알고 있다고 답을 했더니, 리베르타드 역 주변으로는 벌써 단속이 시작되어서 8시 즈음부터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코로나19가 퍼지지 않도록 외출을 삼가라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달이다. 자전거를 끌고 비논도며 산후안까지 쉼 없이 돌아다니던 나와 같은 인간에게 집 안에만 머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반년이 넘게 집 안에만 머문 것은 무심코 바깥에 나갔다가 세상 온 천지가 나쁜 바이러스로 가득한 기분이 들면서 호흡마저 가빠지는 증상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열 명에서 백 명이 되고, 다시 천 명이 되는 것을 보면서 잔뜩 신경을 곤두서버려서 옆집에 사는 중국인들까지 공연히 미워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매우 의외이지만, 임대계약 기간이 끝나 집을 옮긴 것이 내 울적한 기분을 잠재워주었다. 집을 구하고, 코로나9 음성확인서를 떼고, 이사하는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라고는 하지만 장소를 바꾸는 일은 확실히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덜해진 것이다. 물론 중국인을 피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새로 이사 온 곳에도 중국인이 많이 살지만, 예전 집과 다르게 엘리베이터에서 새치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적이 뜸해지는 시간을 골라 저녁에 잠깐 산책하러 나가는 것이 큰 재미였는데, 다음 주부터 그것마저 그만두어야 할 모양이었다. 공연히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런 시기에는 정부 수칙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니, 다시 작년처럼 모든 것을 배달로 해결하고, 집 안에만 있을 요량이었다.

 

Vit Map Taste of Vietnam



다음 주부터 다시 철저한 집콕 생활을 실행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마지막으로 잠깐 외식을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베트남 식당에 가서 뜨거운 쌀국수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났더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냥 집에 돌아가려니 아쉬워서, 대체 어디를 가볼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갑자기 연유가 잔뜩 들어 있는 베트남 커피 생각이 났다. 하이랜드 커피(Highlands Coffee)에서 베트남 커피 원두를 판다고 하기에 699페소를 주고 배달을 해봤지만, 내가 기대한 맛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커피의 향도 별로 진하지 않고, 1kg이나 되는데 가격이 699페소인 것만 마음에 드는 커피였다. 나는 진짜 베트남 커피를 사기 위해 베트남 사람이 한다는 슈퍼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 적힌 영업시간은 완전히 틀린 정보였다. 이제 6시가 지났을 뿐인데 슈퍼 주변은 어둠으로만 가득했다. 굳게 닫힌 문을 보고 그냥 돌아서려는데, 가게 앞에 있던 필리핀인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가게 문을 쿵쿵 두들기기 시작했다. 베트남 커피가 있는지 잠깐 구경을 해보려고 했을 뿐, 꼭 무엇을 사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아저씨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깐 당황해하는 사이 도망갈 기회를 놓쳤다.

가게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결에 들어간 가게 안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식당도 겸하고 있어서 매우 넓다고 들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을 폐업하고 도매점으로만 운영하는 것인지 가게 안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나 때문에 쉬는 시간을 방해받은 기색이 역력한 주인아저씨와 진열대 앞에 있는 간이침대를 보니 재빨리 뭐라도 하나 사서 가게를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재빨리 퇴장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대로 G7과 연유, 그리고 정체불명의 차까지 집어 들고 계산을 치른 내게 주인아저씨가 다가와서 뭐라 뭐라 이야기를 걸어왔다.

베트남어 외에는 한마디도 모르는 아저씨와 베트남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내가 대체 무슨 대화를 할까 싶지만, 굳이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아저씨가 내게 무언가 사서 가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저씨가 진지하고도 친절한 모습으로 내게 손에 쥐여준 것은 다름 아닌 큐브 소스였다. 소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포보(PHO BO)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쌀국수를 만들 때 쓰는 소스로 짐작되었다. 50페소짜리를 팔아 큰 이문이 남지도 않을 터인데,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권유하시는 것을 봐서 좋은 것이 틀림없었으니, 나는 흔쾌히 50페소를 내밀고 아저씨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하도 요란스러운 몸짓으로 가게 문을 열게 하여 가게 직원인 줄 알았던 아저씨는 아무래도 직원이 아닌 듯했다. 그저 가게 주변의 상자를 치워주고 약간의 도움을 받는 눈치이다. 나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쌀국수 소스를 사게 해준 아저씨에게 팁을 좀 주고,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비록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아저씨 덕분에 문 닫은 가게 안도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무한삼겹살(Muhan Unlimited Samgyupsal). 야간 통행이 금지되기 전에 외식하려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듯하다. 식당 안에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베트남  슈퍼(1182 Vietnamese Mart)
나를 보내고 다시 휴식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주인아저씨
큐브 소스만 있다고 쌀국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고기도 필요하고 국수도 필요하고 양파도 필요하다. S&R 슈퍼마켓에 가서 고수(coriander)까지 사고 났더니 그냥 식당에 가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처음 만들어본 베트남 쌀국수의 맛이 매우 괜찮았다는 것은 즐겁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마법 소스의 힘이지만, 매우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베트남 쌀국수를 만드는 마법의 소스 옹차바 포보 큐브소스. 물에 넣으면 냄비에서 갑자기 베트남 향기가 가득 난다.  

 

[마닐라 생활]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베트남 슈퍼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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