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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루손섬

[필리핀 일로코스] 그 멸치의 이름은 빌리스

by 필인러브 202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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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이(Bangui)를 지나 라왁(Laoag City)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눈에 띄게 파도가 잠잠해지더니, 파도가 숨을 죽인 바닷가 끝으로 드문드문 작은 마을이 만들어진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쪽배가 간혹 보일 뿐, 파도와 모래만 가득한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래사장 주변으로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필리핀 신문을 보면 간혹 커다란 자이언트 생선이나 거북이 등이 해안가로 올라왔다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그런 식의 일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일까? 왜 그렇게 잔뜩 사람이 모여 있는지 알고 싶다면 방법은 단 하나. 발길을 멈추고 바닷가로 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 것이다. 마스크를 꼼꼼하게 챙겨 쓰고, 바닷가로 달려갔다. 

2020년과 거의 비슷한 2021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잠깐 마트에 나가는 것 외에는 하릴없이 집에서 보낸 일 년이 특별한 추억거리 하나 없이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 있었던 것은 그래도 2021년의 마지막 날만큼은 낯선 거리에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게 빛났고, 시원하게 불어대는 바람을 만난 나뭇잎은 춤을 추고 있었다. 수영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거센 파도를 가진 바다를 지척에 둔 동네였다. 오후의 햇살은 뜨거웠지만, 쉴 새 없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파도가 시원한 푸르름을 선사하고 있었다. 커다란 망고나무를 가로수 대신 심어두어서 어린아이의 주먹만한 망고가 반짝대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는 일이란 얼음을 가득 채워 넣은 오이 주스를 마시는 것마냥 상큼했다.

바닷가 가까이 가서야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물고기를 잡는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사람들은 물고기를 줍고 있었다. 마트의 반짝 세일이라도 만난 듯 한참이나 분주하게 물고기를 줍는 일이 끝나자 다들 모여들어 어망을 끌어 올리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어망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은 수천, 수만 마리의 작은 생선이었다. 손가락만큼 작은 은빛 생선의 등에는 바다의 푸르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 물고기는 대체 이름이 뭔가요?"
"나는 몰라요."
"네?"
"아이고, 영어로는 뭐라 하는지 모르겠고 우리는 빌리스라고 불러요."

몹시 낡은 다이빙 슈트가 아저씨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을지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내게 물고기의 이름을 알려주지 못했다. 부지런히 어망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한참을 고민하셨지만 결국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옆에서 보던 아주머니가 답답한 듯이 빌리스(bilis) 아니냐고 이야기를 하니 그제야 하하 웃고는 일로코스 지역 사람들은 빌리스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신다. 빌리스가 매우 맛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도 아저씨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고, 엉켜 있던 그물은 이내 가지런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빌리스가 정말 맛있는지는 몰라도 아저씨의 능숙한 손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워졌다. 모처럼 마음이 즐거운 오후가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덧 2021년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필리핀 루손섬. 일로코스
이곳에서는 아이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줍는 법을 알려주면 된다.
빌리스(bilis)
이런 일은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는 것인지, 통을 챙겨와서 즉석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빌리스만 잡힌 것은 아니다. 커다란 물고기도 몇 마리 보였다.
빌리스 사세요!
이 아이스박스가 반 정도 채워질 정도로 빌리스를 사고 싶으면, 500페소를 내면 된다.


[필리핀 일로코스] 그 멸치의 이름은 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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