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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구석구석/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치노이(필리핀 화교)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곳, 중국인 묘지(Manila Chinese Cemetery)



"그럼 주로 어디를 다니는 거예요?"

필리핀 일주를 하고 있다는 내게 R이 여행 중 주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왔다. 일상이 제법 분주하기는 하지만 타인이 듣기에 그럴싸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 터라 묘지 주변을 어슬렁대는 것이 취미라고 답을 했는데, 내 말이 농담인 줄 아는지 깔깔 웃는다.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던 나는 R에게 내 말이 농담이 아닌 진담이라고 재빨리 일깨워주었지만 그래도 R의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예의 바르게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R에게는 별 목적도 없이 묘지 주변을 서성이는 일이 농담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무의미한 이야기이지만, 필리핀 곳곳을 얼마나 돌아다녔느냐를 따져본다면 나는 꽤 상위권에 들 자신이 있다. 이 필리핀이란 나라는 생각보다 넓기도 하여서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이 많으니 나보다 많은 장소를 다닌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나보다 필리핀의 묘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묘지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지 못하다. 알쓸신잡이란 TV 프로그램에 김영하 작가가 나와 세계 도시에 가면 묘지들을 꼭 가본다고 하여 묘지여행이 색다른 여행 테마로 언급된 적이 있지만 내게 각종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와 같은 근사함이 있을 리 없다. 유명 여행 작가가 유럽에 있다는 유명인들의 묘지를 돌아보고 쓴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란 책을 보면 "묘지야말로 소음과 분주함이 넘치는 도시에서 가장 철학적인 장소, 깊은 사색의 장소"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은 묘지에 가도 사색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죽음의 냄새보다는 생활의 냄새가 더 강한 필리핀의 묘지에서 깊은 사색이란 좀 어울리지 않기도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묘지에 갈 때마다 아무 생각이 없이 벤치에 앉아 있다. 누가 보면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오해할 만큼 멍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유명인의 묘지보다는 평범한 이가 쉬고 있는 공동묘지를 좋아한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유명한 묘지를 가보려면 파식강을 지나 북쪽 산타 크루즈(Santa Cruz)로 가면 된다. 커다란 묘지 세 곳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한꺼번에 세 곳을 구경할 수 있다. 한 곳만 가고 싶은데 어디를 가는 것이 좋을까 고민이라면 잠깐 세 곳을 비교해보고 결정하면 된다. 일단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라 로마 가톨릭 묘지(La Loma Catholic Cemetery)로 스페인 시절 콜레라 전염병으로 숨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무덤이다. 마닐라 노스 묘지(North Cemetery)는 1905년에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당시로써는 매우 현대적이며 위생적인 묘지로 설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라 로마 가톨릭 묘지 바로 옆에 있는 마닐라 중국인 묘지(Manila Chinese Cemetery) 역시 스페인 식민지 시절 만들어졌다, 중국계 필리피노인 치노이(Tsinoy)들이 가톨릭 묘지 사용을 금지당하자 자신들을 위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점점 그 규모를 확장해서 현재 마닐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묘지가 되었다. 1850년대에 지어져서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사원으로 꼽히는 Chong Hock Tong Temple 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일본인에 의해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Liat See Tong (Martyrs Hall) 등의 기념관, 벽화 등의 시설이 되어 있으며, 시설 관리는 중국인 협회(Philippine-Chinese Charitable Association)에서 한다고 알려져 있다. 협회에 기여한 바가 큰 사람에게는 묘지에 무료로 안장되는 혜택을 주기도 한다는데 대체 어떤 활동을 해야 기여한 바가 크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암튼, 보통의 수준으로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 무덤을 가지고 있는 유명인을 보면 바타안 전투에 참여했던 전쟁영웅 빈센트 림(Vicente Lim)이나 필리핀 걸스카우트 창립자인 조세파 라네스 에스코다 (Josefa Llanes Escoda) 등 모두 그 사회적 지위가 상당한 사람들이다. 필리핀 마닐라에 이민을 와서 1920년대에 비논도에서 필리핀 처음으로 마미 국수(a noodle soup)와 시오파오(siopao)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중국인 이민자인 마몬럭(Ma Mon Luk)도 1961년에 사망한 뒤 이곳에 안장되었다.  


중국계 필리핀인들의 묘지이지만, 마닐라 여행 중 방문하여도 좋을 만한 곳으로 꼽히는 것은 무덤의 건축 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웅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규모가 정말 엄청나다. 다 돌아다니는 것에 수십 분이 족히 걸릴 정도인데 묘지라는 설명을 듣지 않으면 그저 마을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것도 아주 돈 많은 사람이 사는 부자마을 말이다. 묘지 끝쪽으로 가면 규모가 작은 무덤도 있지만, 도무지 묘지처럼 보이지 않는 저택과 같은 규모의 묘지가 아무래도 더 눈에 띈다. 일부 무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데 전기 콘센트 시설이 되어 있을뿐더러 에어컨까지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무덤만 치운다면 당장 생활을 해도 될 정도의 인테리어 시설을 갖춘 곳도 많다. 어서 이 정도 땅을 차지할 정도면 살아서는 얼마나 부자였을까 싶기도 하고, 주변에 즐비한 빈민가를 보면 기분이 씁쓸해지기도 하고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지는 곳이다. 필리핀 화교(치노이)는 필리핀 전체 인구의 1%가 조금 넘지만 현지 경제의 70%를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장례문화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필리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는 화교의 막강한 경제력을 느끼고 싶다면 가볼 만하다. 내가 비벌리힐스(Beverly Hills)에 살 가능성이란 전혀 없을 듯하여 매우 심드렁한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지만, 이 묘지를 놓고 죽은 자들을 위한 비벌리힐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마닐라 중국인 묘지(마닐라 차이니즈 묘지 - Manila Chinese Cemetery)


주소Felix Huertas Rd, Santa Cruz, Manila, Metro Manila

■ 위치 : 필리핀 마닐라 / LRT 아바드 산토스역(LRT Line 1 Abad Santos station) 근처 







































[필리핀 마닐라] 치노이(필리핀 화교)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곳, 중국인 묘지(Manila Chinese Ceme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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