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 별일은 아니지만, 제대로 되지 않으면 상당히 거슬리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마우스이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이 제 기능을 상실하고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다. 나와 함께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힘겨운 임무를 드디어 끝냈으니, 그동안 고생한 마우스에게 표창장이라도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세상은 쓸모없어진 것들에 대해 비교적 냉혹한 편이다. 그동안 얼마나 잘 사용했는지는 떠올리지 않은 채 주저 없이 마우스를 버리고, 컴퓨터를 살 때 사은품으로 받았던 유선 마우스를 꺼냈다. 원가 절감이란 멋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기능만을 넣어 만든 마우스는 손가락의 감촉부터 익숙하지 못했다. 유선 마우스인지라 줄이 어지러운 것이야 이해하지만, 버튼을 클릭할 때마다 딸칵 소리도 심했다. 나는 컴퓨터 바탕화면의 폴더조차 제자리에 있어야 일을 시작하는 종류의 인간인지라 낯선 마우스에 바짝 신경을 쓰다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
꽤 오랜만에 방문한 보니파시오의 마켓마켓(Market! Market!)은 분위기가 살짝 바뀌어 있었다. 일전에 왔을 때만 해도 죽어버린 도시의 마지막 쇼핑몰처럼 휑하기만 했었는데, 9월이 되었다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곳곳에 붙여 두어서 그런지 제법 활기차 보였다. 코로나19 사태 발생 이전과 비교하면 형편없이 손님이 적지만, 그래도 금요일 오전 시간임을 고려하면 제법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마음만이 풀어진 것일 뿐 상황은 작년 3월과 비교하여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 예전처럼 한가롭게 쇼핑몰을 어슬렁댈 수는 없었다. 재빨리 컴퓨터 샵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코로나19도 필리핀식의 복잡한 구매 과정을 전혀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필리핀에서 마우스를 하나 사려면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단 QR코드를 입력하고, 체온을 잰 뒤 매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마우스 판매 코너 쪽으로 가서 판매 직원에게 진열장 유리 안에 있는 마우스를 좀 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고 잠깐 기다려야 한다. 진열장 안에 있는 제품은 말 그대로 진열용이라 직원이 마우스를 가지러 창고에 다녀오길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마우스를 사고 싶다고 내 마음을 알려주면 직원이 작은 종이를 내미는데, 이 종이에 이름과 연락처, 거주지를 적어주어야 결제 코너로 이동하여 돈을 낼 수 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 하니, 결제 담당 직원에게 가서 돈을 내고 영수증에 서명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돈을 냈음을 증명하는 영수증을 들고 다시 물건 수령대로 이동해만 한다. 물건 수령대로 가면 직원이 다시 종이를 하나 내미는데, 이건 물건을 받아 갔음을 확인하는 종이이다. 고작 마우스 하나 사는데 왜 자꾸 서명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 싶지만, 수령증에 서명을 해야만 비로소 마우스를 손에 쥐고 품질보증 기간이 1년임을 안내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800페소짜리 마우스를 하나 사기 위해서 최소 네 명의 직원을 만나고, 세 번은 펜을 들어야 하는 셈이다.
당장 마우스를 새로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성가신 과정을 거치고 새로 산 마우스를 손에 쥔 뒤 재빨리 마켓마켓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이렇게까지 물건 구매 과정을 복잡하게 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바꾸지 않고도 필리핀이 발전을 꿈꿀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마닐라 생활] 보니파시오 마켓마켓에서 마우스를 하나 사려면
- Copyright 2021. 콘텐츠 스튜디오 필인러브 all rights reserved -
※ 저작권에 관한 경고 : 필인러브(PHILINLOVE)의 콘텐츠(글. 사진, 동영상 등 모든 저작물과 창작물)는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입니다. 필인러브의 콘텐츠를 개인 블로그 및 홈페이지, 카페 등에 올리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전 동의 없이 내용을 재편집하거나, 출처 없이 콘텐츠를 무단 사용하실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마닐라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닐라 생활] 백신접종증명서와 맥스 레스토랑의 공짜 할로할로 (0) | 2021.10.09 |
---|---|
[필리핀 마닐라] 뚜레쥬르에서 케이크를 주문하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 (0) | 2021.09.28 |
[필리핀 마닐라] 120페소의 페이스 쉴드로 부자가 부자 되는 곳 (0) | 2021.09.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