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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마닐라 산책]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

by 필인러브 2023.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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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문 나, 2010년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

 

바랑가이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좁은 골목길은 물론 넓은 대로변까지 온통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북적이던 소음으로 가득하던 거리가 이렇게 조용해지니, 평소와 다른 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골목길을 하얗게 보이게 만들 정도로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그 흔한 고양이마저 거의 보이지 않지만, 가끔 이렇게 조용해진 거리를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앞에 걸어가는 남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남자의 생김새는 매우 평범했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은 남자가 입고 있던 붉은색 티셔츠 때문이다. 티셔츠 뒤에 한글로 '결의문 나, 2010년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티셔츠 왼쪽 아래로는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도장 모양이 선명하다.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필리핀 사람이 이런 디자인의 티셔츠를 대체 어디에서 구한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우까이우까이(중고의류 가게)에서 샀다고 보기에는 이제 막 포장 비닐에서 꺼내 입은 것처럼 티셔츠가 너무 깔끔하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와서 잠깐 검색을 해보니 10년도 훌쩍 더 지난 2010년에 남아공월드컵 붉은 악마 티셔츠로 사용되었다는 티셔츠이다. 모두가 '하나된 한국'을 외치고 있었을 2010년에 나는 무엇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나브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온통 지워버린 모양이었다. 

 

결의문 나, 2010년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
필리핀 마닐라, 바랑가이 선거 벽보
시끄럽던 가게에 셔터문이 내려지고, 바랑가이 선거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만 보인다.
한국슈퍼도 문을 닫았다.
필리핀 바랑가이 선거벽보

 


[마닐라 산책] 어느날 또다시 붉게 타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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