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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마닐라 생활] 그랩카와 라디오 드라마

by 필인러브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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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라디오 드라마 소리

 

 

차에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붙였던 스티커가 가득했다. 누군가 떼어내려고 시도했지만 잘되지 않았는지 모퉁이만 잔뜩 찢어져 있다. 하지만 차가 낡아 보이는 것이 지저분한 스티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된 차였다. 2012년 스티커가 있는 것을 봐서 최소 10년은 탔을 차는 움직일 때마다 '그르렁' 혹은 '덜덜'과 같은 내지 멀아야 하는 소리를 냈다. 쿠션감이라고는 전혀 없이 푹 가라앉은 의자는 차가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를 함께 움직여 댔고, 의자가 움직일 때마다 언제 던져놓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먼지가 뒤엉킨 온갖 잡동사니가 함께 흔들렸다.

 

이상하게 차가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약속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그랩은 물론이고 오토바이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20분 넘게 앙카스와 무브잇, 조이라이드 앱을 켜놓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호출이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자동차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자신이 그랩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평소와 같으면 이런 차는 타지 않지만, 시간이 급하니 차량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놓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도착하지 않으면 사진을 들고 경찰서에 가보라는 농담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걱정해야 했던 것은 납치나 강도 등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어마어마한 수다쟁이였다. 자신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면서 이 동네에서 차가 필요하면 자신을 부르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좀 친절한 아저씨인가 했더니, 잡담이 어찌나 과한지 골치가 다 아프다. 이런 잡담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아저씨가 속이 훤히 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름값이 올라 힘들다고 투덜대어도 대꾸를 해주지 않자 갑자기 차가 많이 막힌다는 소리를 시작한다. 내게서 이 동네에 차가 막히지 않는 것을 본 적이 대답을 듣고서 기름값 이야기는 멈추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콘도를 6.5밀리언에 팔아야 하는데 살 생각이 없냐는 등의 엉뚱한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중요한 일이 생긴 듯한 시늉을 하면서 핸드폰을 보면서 대꾸를 멈추자 아저씨는 라디오를 틀었는데, 전형적인 필리핀 스타일의 드라마였다. 왜 그렇게 만날 울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필리핀 드라마는 주인공이 하염없이 울기를 반복해서 잠깐만 들어도 왜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에 빠져드는지 깨닫게 해준다. 다행스럽게도 라디오 드라마의 주인공이 시끄럽게 울다 웃기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럭저럭 차는 움직여 주었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잔돈 따위는 필요 없으니 가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손바닥을 내밀자 차 안에 있던 동전을 대충 세어서 건네주었다. 원래 받아야 하는 돈보다 약간 모자라는 듯싶지만, 20페소 때문에 아저씨와 함께 더 있고 싶은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는 간단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한숨이 나왔다.

 

 

[마닐라 생활] 그랩카와 라디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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