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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여행하기/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루프물 영화의 거북이 형



어제와 비슷한, 아니, 지난주 또는 지난달과 비슷한 아침이었다. 요즘 나의 아침은 이불을 개키고, 형(거북이 이름)의 물을 갈아주면서 시작된다. 오후가 되면 너무나 더워서 형 옆에 앉아 있는 것조차 곤혹스럽게 여겨지곤 했으니 손가락도 움직이기 귀찮은 마음이 들기 전에 청소며 빨래를 말끔히 해두어야만 했다. 코로나19와 더운 날씨가 합세하여 나를 매우 규칙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똑같으니 흡사 '사랑의 블랙홀'과 같은 루프물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지만, 재미없는 영화도 끝은 있는 법이라고 적당히 생각하기로 했다. 며칠 분량의 영화인지 확인은 어렵지만, 요즘 내가 찍고 있는 이 지루한 영화에도 엔딩 크레딧이 있을 터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불평분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투덜대기 쉬운 상황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불평하기를 습관으로 들이면 여간 곤란하지 않다. 전 세계로 바이러스를 보내버린 중국인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유 없는 짜증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이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날씨만 해도 그렇다. 4월이 5월로 가면서 공기가 한결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덥다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그것이야말로 곤란하다. 그렇다. 빨래가 보송보송 잘 마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지금이 우기가 아닌 것이, 요즘 같은 때에 따알화산이 폭발한다고 웅성대지 않는 것이 그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물론 마음속 깊은 곳을 뒤적여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치장한다고 하여 더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하늘마저 더운지 푸른 색깔을 잃고 있는 요즘이었다. 하루가 반쯤 흐르고, 오후 햇살이 진해지면 길 건너 골목은 그림처럼 움직임이 사라져 버리고 비현실적인 풍경이 되곤 했다. 벌써 50일 가까이 꼼짝도 하지 못한 지프니들이 빠야드 뽀를 외치는 승객 대신 햇살만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일을 나가지 못하면 대체 다들 무엇을 먹고살까. 하루를 무엇으로 소일할까. 나의 타루칸 꼬마 녀석들은 내가 석 달째 빵 배달을 가지 못하고 있음이 역병 때문임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내가 바빠서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별과 달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느끼게 되고, 소독약 차가 꽁무니에 흰색 구름을 달고 거리를 지나는 것조차 구경거리가 된 요즘에 와서 내게 가장 큰 기쁨이 된 것은 거북이 형이었다. 이렇게 집에만 머무는 시기에 형이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형이 하는 일이라고 해야 온종일 잠을 자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갑갑증이 나서 발코니로 나가 왝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순전히 형 덕분이었다. 형이 사는 거북이의 세상과 내가 사는 인간의 세계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지만,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런 골짜기가 있는 편이 좀 더 흡족했다. 그러니까 숨만 쉬어도 예쁘다는 것은 우리 형에게 매우 적합한 이야기이다. 무엇을 해도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소고기를 달라고 입을 쩌억 벌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긴 목을 한껏 빼고 둥근 두 개의 콧구멍을 벌름댄다거나, 귀찮음이 역력히 내보이며 게으른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언제 봐도 "어이구, 예뻐라!"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만들곤 했다. 거북이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나는 계속 팔불출 되어 보기로 했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루프물 영화의 거북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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