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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여행하기/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서른아홉 개의 오이와 목욕탕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라고 해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최근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배달하는 분들이 없었으면 삶이 참 퍽퍽했으리라는 것, 그리고 배달하는 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이다. 


물건 주문 시 단위 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소소한 이야기 하나.

오이 다섯 개를 주문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채소 가게에서 오이 5kg을 보내왔다. 주문 내역서를 보니 5개라고 적은 것이 틀림없는데 보내온 영수증에는 5kg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 물건을 챙겨 넣는 분이 잠깐 착각을 하신 듯했다. 나는 불량품을 받아도 환불하러 가기보다는 불량품의 장점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종류의 인간이라서 채소 가게 꾸야를 다시 부를 의지 따위는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오이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다. 냉장고에는 오이를 위한 공간이 전혀 없었으니 상하기 전에 얼른 오이를 먹어야만 하는데, 산더미처럼 많은 오이를 대체 어떻게 해서 먹으면 좋단 말인가. 오이의 처리 방법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 채로 요리 전문 블로그를 여기저기 돌아봤지만, 서른아홉 개나 되는 오이를 한꺼번에 처리할만한 획기적인 요리법을 알려주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이 냉채도, 오이무침도 오이 한두 개가 필요할 뿐이었으니, 오이지를 담그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오이지를 담아둘 통으로 쓰기 위해 잡다한 물건을 담아두던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 비워 깨끗하게 씻어놓고, 일회용 버너의 가스를 새로 갈아 끼우는 것으로 오이지 만들 준비를 시작했다. 굵은 소금을 한 줌 꺼내 소금물을 끓여 놓고, 또다시 소금을 한 줌 꺼내어 오이를 깨끗하게 벅벅 씻어냈다. 그리고 좁은 방안을 가득 채우는 진하디진한 오이의 향을 맡으면서 한국 목욕탕 생각을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잔뜩 차지하던 초록의 오이들. 올록볼록한 플라스틱 강판에 정성껏 갈아낸 오이 향이란 얼마나 친근하고 상큼했단 말인가. 때를 밀어서인지 아니면 더워서인지 발그레해진 얼굴로 오이 마사지를 하던 아주머니들이 요즘도 목욕탕에 계실지. 코로나19라는 놈 때문에 6개월 가까이 하릴없이 집에만 있는 주제에 언제 다시 한국의 목욕탕에 가보게 될지 기약도 없으면서 오이 향이 가득하던 목욕탕 냄새가 잠깐 그리워졌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숫자'로 느껴지면서부터 무감각해지기만 하던 마음이 이렇게 센치해지다니, 바다를 거쳐와 짭짤한 바람 냄새를 품은 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그런가 보다. 




[필리핀 마닐라] 서른아홉 개의 오이와 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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