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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by 필인러브 2017.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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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갈 곳을 모르던 심장이 길을 떠났다. 지도도 나침판도 없는 떠남이었다.
그냥 떠난 길 위에서 심장이 만난 것은 오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내가 있었다. 아버지가 될 준비가 아직 덜 된 사내였다.
어쩌다 아이를 가지게는 되었지만, 실수에 가까운 일이라서 도망을 가기로 했다.
마침 사내는 군인이라 멀리 떠나기가 쉬웠다.
실수를 잊을 만큼 먼 길을 떠난 사내는 실수를 묻을 만큼 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가 남긴 아이가 채 첫 발걸음을 떼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이는 한 번도 아버지를 궁금해하지 않고 자라나서 다 큰 성인이 된 후에야 아버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당시 그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음을 알아내야만 했다.
아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아이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다.
고장 난 시곗바늘의 흐름처럼 정확하지 않은 시간의 흐름 뒤에 아이의 심장은 오갈 곳을 까맣게 잊고야 말았다.
그래도 심장은 이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은 어디로 가도 좋다는 것과 그 의미를 마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는 게 삐거덕대는 느낌이 오는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비가 내리듯 마음에 검은색이 덮치기도 했다.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나의 세계는 어디가 고장 난 것일까. 심장은 가만히 생각했다.
의문표가 밤을 채웠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을 의문이었다. 


                                                                     - 퍽 오래전 어느 날, 일로일로에서의 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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