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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여행] 낡은 라디오와 스탠 바이 미

by 필인러브 2019.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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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장을 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양배추 한 줌과 껍질 끝이 시들해진 레몬 두 개만을 품고 있는 냉장고의 모습이 꼭 내 머릿속처럼 무언가 꼭 있어야 할 것이 빠진 듯 비어 보였다. 머릿속을 채우는 일은 어려워도 냉장고를 채우는 일 정도야 쉽다. 시장에 가서 달걀이며 과일을 좀 사야겠다고 나섰는데, 자전거 앞바퀴 쪽 타이어의 바람이 홀쭉했다. 하지만 선크림은 없어도 자전거 펌프만큼은 가방에 늘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 주저 없이 자전거 펌프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어깨 근육을 써도 타이어에는 바람 한 조각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러는 것일까 싶어 타이어를 꼼꼼히 매만져 보니 압정이 박힌 것이 눈에 띈다. 이래서야 아무리 펌프질을 한다고 해도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이 들어갈 리가 없다. 대체 누가 압정 따위를 길거리에 버렸을까 싶지만, 그런 걸 불평한다고 해서 상황이 개선될 것 같지 않았으니, 나는 얼른 자전거를 끌고 볼커나이징(vulcanizing)해주는 가게에 가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집에서 자전거 타이어 수리점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이지만, 가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걸으면 모를 일이지만, 자전거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에 그렇게 먼 길이 없다. 11kg였던가 13kg였던가. 암튼 10kg이 넘는 자전거가 어깨를 누르면 생전 땀이 나지 않던 부위에까지 땀이 물처럼 흐르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도무지 자전거를 어깨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은 예전에 자전거 수리하는 꾸야가 이렇게 바람이 빠진 상태에서 자전거를 질질 끌고 오면 타이어 휠이 다 망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두어 달 전부터 실업자가 된 나로서는 자전거가 망가져서 새로 사야만 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 몸을 혹사하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나는 큰돈을 쓰는 고통보다는 어깨 근육을 쓰는 고통이 훨씬 낫다고 중얼대면서 엉금엉금 길을 걸어갔다.   


다행히 골목길 저 멀리에서부터 자전거 수리점 꾸야가 내 모습을 발견하고 달려와 주었다. 그런데 이 꾸야, 알고 보면 아이큐가 200이 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전거를 세워서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편하게 끌고 가니 하는 이야기이다. 그 신묘한 방법을 몰랐던 탓에 이미 티셔츠 끝까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버린 나로서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기가 어려워서 입을 쩍 벌리고 감탄을 한 채 꾸야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꾸야 앞에 쪼그리고 앉아 꾸야가 쓱쓱 자전거 타이어를 벗겨내고 구멍을 메운 뒤 다시 바람을 채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가게 구석에 놓아둔 낡은 라디오는 나만큼이나 나이가 잔뜩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고물상으로 가고 싶지는 않은지 크고 선명하게 스탠 바이 미(stand by me) 노래를 흘려보내 주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주름 사이사이까지 검은 기름때로 가득한 꾸야가 입에 물린 담배가 다 타기도 전에 타이어를 고치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오랜만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실로 매우 오랜만에 무언가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적어두고 싶어진 마음이 들어서 갑자기 웃고 있는데 꾸야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40페소를 주면 된다고 알려왔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팁 20페소를 더해 60페소를 내밀고 같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팁 20페소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꾸야가 웃어왔다. 나는 그 웃음을 보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지만, 다음에 또 오라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꾸야가 아무리 친절하다고 해도 볼커나이징 가게의 단골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필리핀 마닐라 여행] 낡은 라디오와 스탠 바이 미

- 2019년 6월, 필리핀 마닐라, written by Saling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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