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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거북이 형과의 산책

by 필인러브 2019.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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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오후, 나의 잘나신 친구분이 뭐 하고 지내느냐고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재빨리 "형 산책 시켜"라고 답장을 보냈지만, 그 뒤 소식이 없다. 평소 답장이 빠르고, 말도 많은 이 친구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더니, 좋은 하루 보내라는 간단한 답만을 보내왔다. 거북이 산책시킨다고 하지 말고 그냥 거북이 운동을 시키고 있다고 답을 할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지겨워진 와중에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알레르기 증상이 심한데 별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장을 그만둔 이후 실업자 신세가 된 내가 요즘 가장 즐겁게 하는 활동을 두 가지 꼽으라면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읽기와 "형"이라고 이름 붙인 나의 거북이를 산책시키는 일이다. 반수생 거북이에게는 햇살에 일광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건강한 거북이를 만들기 위해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시원한 오후가 되면 나는 기꺼이 거북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물론 강아지처럼 목줄을 해주고 어디 공원에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키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처럼 거북이를 데리고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매우 혼란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운동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거북이이고 나는 그저 거북이를 발코니에 풀어놓고 잘 움직이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정도이다. 가끔 운동 잘한다는 칭찬의 말을 건네보지만, 대답이 없으니 대화가 이어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거북이는 햇살에 등갑을 말리면서 각자 할 일을 하면 된다. 


나는 종종 나의 사랑스러운 형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고는 하는데, 매우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칫솔을 들고 형 등을 닦아주다가 오줌 세례를 받는 것은 별로이지만, 도무지 형에 대해 자랑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전래동화에 있어 왜 거북이가 현명한 동물의 대명사로 꼽혔는지는 매우 의문이다. 도무지 현명하다거나 똑 부러지는 모습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데, 가끔 등이 뒤집혀서 버둥대는 꼴을 보면서 한숨을 쉴 때도 있다. 발코니 난간에 끼어서 버둥대는 꼴을 보면 좀 머리가 나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늘 한결같기는 하니까 우직하고 덤덤한 점은 인정하지만, 2015년 1월 19일 이후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도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물론 나의 사랑스러운 형만 좀 현명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특별히 형과 같은 종류의 거북이만 좀 그런 면이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형 외에 다른 거북이를 키울 생각은 전혀 없으니 그 정답을 알 도리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내가 남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무척 애를 쓰는 편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만이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쪽이 나를 더 기쁘게 하기에 좋은 점을 찾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편인데, 덕분에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일도 생기지만 세상을 밝고 맑고 환하게 볼 수 있으니 전반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암튼, 그런 나에게도 다양하게 형을 칭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가 형에게 할 수 있는 칭찬이라고 해봐야 밥도 잘 먹는구나와 목도 길게 잘 내미는구나 혹은 많이 컸구나 이 정도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눈을 깜빡이는 것이 귀엽다거나 발도 길게 쭉 잘 뻗고 잠을 잔다는 칭찬을 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칭찬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을 해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스무 개를 넘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형에 대한 칭찬은 매우 단조롭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대상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 형이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 첫 만남. 이 많은 거북이들 중에서 형이 내게 온 것은 나에게 매우 행운이었다. 



▲ 2015년에는 이런 작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 어릴 때는 더 자주 배를 보여주었다. 



▲ 2016년도 정도가 되자 이렇게 커졌다. 



▲ 어릴 때는 플로팅 스톤(Floating stone) 위에 올라가서 잠도 자고 했지만, 2019년인 요즘은 플로팅 스톤을 끌고 돌아다닌다. 위에 올라가다니, 이제 어림도 없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중에 거북이를 키우고 싶다면, 깔띠마 시장(Cartimar Market)에 가면 된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거북이를 잔뜩 보고 싶으면 아빌론 동물원(Avilon Zoo)에 가면 된다. 


+ 관련 글 보기 : [필리핀 마닐라 근교 여행] 소문과는 다르게 별 다섯 개. 아빌론 동물원(Avilon Zoo) 





▲ 늘 형에게 목도 길게 잘 뺀다고 칭찬을 했는데, 로티 아일랜드 뱀목 거북이(Roti Island Snake Necked turtle)란 더한 놈이 나타났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거북이 형과의 산책 

- 2019년 7월, 필리핀 마닐라, written by Saling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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