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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언어] 공용어가 타갈로그어가 아닌 필리피노어(필리핀어)라고요?

by 필인러브 201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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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단디 차아래이."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서울댁 아주머니가 집에서 한참이나 먼 지방으로 시집을 가서 아직 새댁이라는 호칭이 낯간지러웠을 시절, 그 시집살이가 얼마나 독하였는지 야단맞는 소리가 담장을 지나 동구 밖까지 소문이 날 지경이었다. 만날 야단만 맞는 며느리도 속이 상했지만, 시어머니 처지에서도 할 말은 있는 법. 주방을 치우라고 하는데 며느리가 멀뚱한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으니 부아가 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많은 일에 있어 약이 되어서, 서울댁 아주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에도 시간이 약이었다. 서울댁 아주머니가 "밥 퍼어득 무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재빨리 밥그릇을 비울 수 있게 될 즈음이 되자 시집살이의 고됨도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결국 언어 문제가 컸다는 이야기였다. 




■ 필리핀에는 몇 개나 되는 언어가 있을까? 


전 세계에는 7,102개의 언어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 명 중 한 명은 12개의 언어 중 하나를 쓰고 있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가장 많은 국가에서 통용되는 언어 1위는 영어이다. 무려 101개나 되는 국가에서 영어를 쓰고 있다고 하니, 전 세계 국가 중 절반은 영어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 뒤를 차지하는 것은 아랍어,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이다. (사용 국가가 아닌 사용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중국어가 1위이다. 중국어 다음으로 스페인어, 영어, 힌디어, 아랍어 순으로 사용 인구가 많다 ) 매우 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 언어의 96%가 전체 인구의 3% 사이에서만 사용된다는 점이다. 언어 중 대부분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쓰이는 언어는 매우 다양하여 각 대륙에서 쓰이는 언어가 2천 개 이상이라고 보고된다. 말할 수 있는 이가 천 명도 되지 않아서 조만간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언어도 많다. 우리나라의 제주어만 해도 노인들만 사용하고 있어 소멸 바로 전 단계로 분류된다. 사투리는 촌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표준어의 사용을 권장하는 사회에서 제주도의 말이 세대 간의 전승되기란 어렵겠지만 제주 느낌 물씬 나는 예쁜 단어들까지 시나브로 사라져 감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어 배우기도 바쁜 세상에 방언까지 챙길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쓰는 토착어를 지키기 위해 힘쓰는 것은 그 언어가 쌓아온 역사를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언어가 사라진다면 그 언어로 쌓아온 문화와 지혜를 보존하기 어렵다. 제주도나 전라도 등의 지방을 중심으로 방언사전과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고된 작업이지만 연구를 지속해갈 가치가 있다.


필리핀에 대한 정보를 적은 글을 읽다 보면 가끔 필리핀 언어에 대해 "필리핀어와 영어 외에도 10여 개의 방언이 사용되고 있다"는 설명을 읽게 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언어를 어떻게 분류하는가에 따라 그 숫자가 조금 달라지기는 하지만, 필리핀에는 120~175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기독교 언어학 봉사 단체인 에스놀로그(Ethnologue: Languages of the World)에서 분류한 바에 따르면, 필리핀에는 182개의 원주민 언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100만 명 이상의 화자가 있는 언어는 13개에 불과하다. 타갈로그어 외에 Cebuano, Ilocano, Hiligaynon, Ilonggo, Bicol, Waray, Pampango 그리고 Pangasinens 등이 주요한 방언으로 손꼽히기는 하지만, 세밀하게 더 세분화하면 500개 이상으로도 분류된다는 조사 결과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까지 다양한 언어가 나오게 된 것은 7천 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된 섬나라라는 지형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그간 필리핀 정부에서 언어를 통일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고향이 다른 필리핀 사람들끼리 상호 의사소통을 어려운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언어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각기 완전히 다른 언어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같은 단어라도 지역에 따라 사용되는 의미가 전혀 다른 경우도 있으니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필리핀의 공용어는 무엇일까?





■ 필리핀 공용어 


한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언어를 공용어(Official Language)라고 한다. 그리고 공용어의 개수는 국가에 따라 다르다. 공용어가 없는 나라도 있지만, 볼리비아처럼 공용어가 37개나 되는 나라도 있다. 한국은 원래 공식적으로 공용어가 없는 나라였지만 2004년에 국어기본법이 제정되면서 한국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2016년에 한국수화언어(한국수어)가 공용어로 추가되기도 했다. 어느 나라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공용어를 바꾸는 예도 있는데, 필리핀도 그런 국가 중 하나이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1565~1898) 스페인어는 공용어는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어 사용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쓰는 언어란 대단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어가 공식적인 공용어는 아니었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어와 라틴어 알파벳 표기를 배우고자 애썼다. 타갈로그어 단어 중 스페인어로부터 영향을 받은 단어가 대략 5천 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 시절 만들어진 단어가 많다. 그러다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미국은 스페인과 달리 영어를 보급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미국 식민지 시대(1898~1942)에 미국은 "미국인의 가치관을 가진 필리핀 사람"을 만들고자 했고, 영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영어는 공용어가 되었으며,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학교를 만들었고, 아이들이 학교에 오게 하기 위해 무상으로 초등교육을 하기도 했다. 책이며 연필 등까지 무상으로 지급하였으니, 미국인의 학교는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군이 만든 학교에 다닌 필리핀의 아이들은 미국의 책을 읽고, 미국의 문학을 공부하며 미국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어 쓰기가 타갈로그어 쓰기보다 자연스러워지면서 필리핀의 미국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루이스 케손(Manuel Luis Quezon)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타갈로그어가 공용어가 되기를 원했고, 1940년부터 타갈로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 미국 식민지 시기였다. 타갈로그어가 공영어로 지정되지는 못했지만, 타갈로그어 살리기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필리핀이 정식으로 독립을 하자 타갈로그어는 공용어가 되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독립 이후 영어와 타갈로그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이중언어 정책을 사용했는데, 교과목에 따라 언어를 달리하여 수업하기도 했다. 타갈로그어의 어휘로는 과학 분야를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보았으니, 과학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이 왔다. 1986년은 필리핀에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던 해였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민주화 혁명(피플 파워 혁명)이 일어났으니 세상이 조금은 바뀌었다. 이듬해 1987년, 필리핀 정부에서는 필리피노어(Filipino)와 영어를 공용어로 선언했다. 그리고 세부아노어와 일로카노어,힐리가이논어, 아클란어, 비콜어, 차바카노어, 이바나그어, 이바탄어, 카팜팡안어, 키나라이아어, 마긴다나오어, 마라나오어, 팡가시난어, 삼발어, 수리가오논어, 타갈로그어, 타우수그어, 와라이와라이어, 야칸어가 등 19개의 언어가 공식적인 보조어로 사용된다고 공표되었다. 공용어를 지정한다고 해서 각 지방에서 쓰던 방언을 갑자기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19개의 언어를 보조 공식어로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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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언어.pdf




■ 필리피노어(필리핀어. Filipino)와 타갈로그어


흥미로운 것은 필리핀 헌법에 적힌 언어(LANGUAGE) 사용 부분을 보면 공용어가 필리피노어(Filipino)와 영어라고 적혀있다는 점이다.  "The national language of the Philippines is Filipino."라고 시작되는 규정 그 어디에도 타갈로그어(Tagalog)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 정부에서 타갈로그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굳이 필리피노어라고 명칭을 바꾸어 기재한 이유는 타갈로그어의 사용을 반대하는 쪽의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리피노어(필리핀어, Filipino)는 무엇일까?

필리피노어는 수도인 메트로 마닐라에서 사용되는 언어, 즉, 타갈로그어를 기초로 하여 필리핀 각지에서 쓰는 지방 언어에서 일부 어휘를 받아들인 뒤 국가에 의해 표준화된 언어이다. 실질적으로 타갈로그어와 거의 같아서 필리피노어를 타갈로그어의 또 다른 명칭으로 보는 이가 많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타갈로그어와 완전히 같다고 볼 수 없다. 필리피노어에는 지방어에서부터 온 어휘나 외국어로부터의 온 어휘가 많이 도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타갈로그어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헌법에 적힌 19개의 공식적인 보조어 목록을 보면 타갈로그어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영어가 필리핀의 공용어이기는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의 모국어는 아니라는 점이다. 공용어이다 보니 필리핀 학교에서도 영어가 매우 중요한 교과목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교과 수업을 현지어(타갈로그어 또는 지방어)로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 학교나 지역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는 언어가 다르고, 학비가 비싸거나 교육 수준이 높은 학교일수록 학교에서 영어를 쓰는 비중이 높다. 필리핀 중·상류층에서는 따갈로그어보다 영어를 쓰려는 경향이 있는데, 소득수준 혹은 교육 수준에 따라 영어 사용 능력에 차이가 크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하는 이가 꽤 많지만, 보통 필리핀 서민들을 보면 영어보다 타갈로그어 사용이 자연스럽고 더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필리핀 사람들의 영어 능력에 관해 "필리핀 인구 중 7% 정도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기도 하다. 10년 정도 전에 진행된 조사이기는 하지만, 지금 조사를 시행한다고 해서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의 영어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따갈로그어화된 영어(따글리쉬. Taglish)를 쓰는 경우도 많다.


+ 관련 글 보기 

[필리핀 언어]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전의 토속 문자, 바이바이인(Baybayin)

[필리핀 언어] 걸레와 정치인,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등재된 필리핀식 영어단어



■ 타갈로그어 및 보조 공식어의 사용 인구


2010년도에 필리핀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타갈로그어 및 보조 공식어의 사용 인구는 아래와 같다. 사용 인구가 많지 않은 보조어도 많다. 타갈로그어의 경우 텔레비전이나 뉴스 등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조사된 것(22,512,089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마닐라 사람이 일롱거는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일롱거를 하는 일로일로 사람이 타갈로그어를 구사할 가능성은 높다.







※ 위의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 THE 1987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 – ARTICLE XIV

https://www.officialgazette.gov.ph/constitutions/the-1987-constitution-of-the-republic-of-the-philippines/the-1987-constitution-of-the-republic-of-the-philippines-article-xiv/

· '한국어의 힘’ 펴낸 영어학자 김미경 교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524212







[필리핀 언어] 공용어가 타갈로그어가 아닌 필리피노어(필리핀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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