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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뒷이야기]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리잘은 정말 미국에서 만든 영웅일까?

by 필인러브 2019.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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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野史)에 근거한 부분도 많습니다. 



업무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하다는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그런 왕의 자리에서 일만 아는 일벌레로 살면 장수하기 힘들 것 같지만,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합스부르크가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고희의 나이까지 살았다.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펠리페 2세는 조선에서 연산군의 뒤를 이어 중종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시기(1527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선조 31년(1598년)에 죽었는데 왕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서류 정리에 집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최강국 스페인이 해가 지는 국가가 되어 버린 원인 중 하나로 펠리페 2세가 종교 전쟁을 위한 서류에 마구 서명을 했다는 것을 꼽을 정도이다. 하지만 7개의 바다를 지배하며 에스파냐의 황금시대를 이끈 절대군주라고 해도 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펠리페 2세(Philip Ⅱ)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7천 개의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서 필리핀(Philippines)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한 뒤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사망했다. 



■ 일러스트라도(Ilustrado)와 호세 리잘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페인 제국은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 식민지를 세웠다. 필리핀도 1565년부터 1898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길고 긴 스페인 식민지 시절은 필리핀에 일러스트라도(Ilustrado)라는 이름의 중산층을 만들어냈다. 스페인인 또는 중국인을 아버지나 어머니로 둔 혼혈인으로 고등교육을 받아 완전히 서구화된 사상을 가지고 있던 지식인 계층이었다. 일러스트라도 계층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다면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세 리잘(José Rizal)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꺼내 보면 된다. 몸에 딱 맞게 만들어진 양복에 잘 닦여진 구두, 적당히 잘 손질된 머리까지, 옷차림에서부터 부유층의 느낌이 난다. 실제 호세 리잘의 아버지인 프란시스코 메르카도는 상당히 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라구나주 칼람바에서 스페인 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사탕수수 농장을 관리해주는 일을 하였다고 하는데, 칼람바 지역에서 유일하게 석조로 된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의 직업이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지만 열 한 명이나 되는 아이 중 일곱째였던 아들을 마닐라에 있는 대학을 보낼 정도로 상당히 재력가였음은 틀림없다. 어머니 역시 상당히 상류계층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높았다. 리잘은 어머니에게 읽고 쓰기를 배웠다고 하는데 집에 따로 서가가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 살 때부터 책을 읽어서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이 아이를 부모는 의사로 만들기로 했으니, 호세 리잘은 마닐라로 가서 아테네오 대학과 산토토마스 대학에서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일러스트라도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서구식 양복을 잘 차려입고 멀고 해외 유학길에 오르는데, 안과 전문의가 되고자 했다고 한다.  그는 마드리드와 유럽 등지에서 살면서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익혔는데, 유럽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고 전해진다. 호세 리잘이 몇 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느냐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면, 11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21개국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보이는데 과연 어느 자료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최소 10개 국어 이상을 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 유학생활과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 


그런데 해외 유학이 호세 리잘에서 가져다준 것이 다양한 언어 능력만은 아니었다. 유럽에서의 생활은 일러스트라도 계층의 청년에게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인식하게 했다. 외국에서 겪은 차별이 민족의식과 혁명 의식을 깨우치고 필리핀의 개혁과 해방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한 셈이다. 1892년이 되자 호세 리잘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힘없는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필리핀 민족동맹(La Liga Fulipina)이란 단체를 조직하여서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였는데, 스페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무장투쟁론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즉,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호세 리잘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호세 리잘은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필리핀 사람도 스페인 사람과 같은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필리핀도 에스파냐의 한 지방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어 에스파냐 의회에 필리핀 지역구 의원이 진출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호세 리잘은 참정권과 시민권을 갖는 정도만을 주장했지만, 스페인 쪽에서 볼 때는 호세 리잘의 평화로운 저항도 눈엣가시였다. 아무리 온건한 움직임이었다고 하여도 저항의 씨앗은 일찌감치 없애야만 했으니, 스페인 총독은 호세 리잘을 무장 투쟁론자들의 배후로 몰고 멀고 먼 민다나오의 다피탄City of Dapitan)까지 유배를 보내기로 했다. 당시로써는 마닐라에서 민다나오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지만, 다피탄에서 철창 속에 갇혀 감옥 신세를 지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배지에서 호세 리잘은 홍콩에서 만났던 조세핀 브렉켄(Josephine Bracken)과 함께 사실혼 관계를 맺고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의 전공을 살려 동네 주민을 진료하기도 하고, 인근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험난한 시기였다. 호세 리잘은 스페인 총독부의 명령에 따라 마닐라로 이감되어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내에 있는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1861년 6월 19일 ~1896년 12월 30일 


마침내 1896년이 왔다. 그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다. 스페인 총독부에서는 호세 리잘을 카티푸난이 일으킨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하였고, 반식민 폭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마닐라 시내(현재 리잘공원이 있는 자리)에서의 공개 총살형을 선고했다. 1896년 12월 30일 아침, 호세 리잘은 조세핀 블렉켄과 결혼 서약을 했고, 처형장에 올라 등에 총을 맞고 35살의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호세 리잘의 죽음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등 많은 청년을 필리핀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핀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호세 리잘에 대해 미국 식민지 시절에 미국 정부로부터 지명받아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300년 가까이 집에 있던 도둑들에게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주인의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독립운동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호세 리잘의 죽음을 보고 많은 이들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니, 필리핀 역사에 불러온 여파가 컸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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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 속에서 호세 리잘의 흔적 만나기 


- 호세 리잘(José Rizal)을 스페인식으로 발음하면 호세 리살이 되지만, 필리핀에서는 보통 리살보다는 리잘에 가깝게 발음한다. 필리핀 정부에서 배포한 독립운동가 영상에서도 호세 리잘이라고 발음되고 있다.

- 칼라바르손 지방의 리잘 주(Province of Rizal)의 주명도 호세 리잘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 호세 리잘(1861년 6월 19일 ~1896년 12월 30일)이 죽은 12월 30일은 호세 리잘의 날로 필리핀의 국경일이다.

- 호세 리잘의 옆 모습을 보려면 1페소 동전을 보면 된다.

- 1961년에 호세 리잘 100주년 기념 은화가 발행되기도 했다. 이 은화는 한국 돈으로 4만 원 정도에 거래된다.

- 호세 리잘의 흔적을 보고 싶으면 마닐라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리잘공원(Rizal Park)에 가면 된다. 이 공원은 원래  루네타 파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호세 리잘(Jose Rizal)을 추모하기 위해 리잘파크로 그 이름을 바뀌었다. 마닐라 대성당 앞에 있는 포트산티아고(Fort Santiago) 요새에 가도 호세 리잘 박물관(Jose Rizal Museum)과 동상(Jose Rizal Monument)을 볼 수 있다.

- 호세 리잘이 죽은 모습을 그려낸 그림이나 동상을 자세히 보면 모두 그가 등에 총을 맞은 모습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세 리잘의 총살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스페인군 소속 필리핀인들이 뒤돌아선 상태에서 총을 쏘았다고 되어 있는 까닭이다.

- 치노이 박물관(Bahay Tsinoy) 안에도 관련 자료가 좀 전시되어 있다. 인트라무로스 안에는 일러스트라도(Ilustrado)라는 이름의 레스토랑도 있다.

-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리잘은 독립운동가이기 전에 의사이자 저술가, 시인이었다. 그는 처형되기 전날에 그의 마음을 담은 길고 긴 시를 썼고, 어머니가 마지막 면회를 왔을 때 하녀의 등잔에 숨겨 몰래 전달해주었다고 한다. 원래 이 시에는 제목이 붙여져 있지 않았지만, 일로코스 출신의 성직자인 마리아노 데카나이(Mariano Decanay)가 시에 "나의 마지막 작별(Mi Ultimo Adios)"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담긴 글귀 때문에 필리핀에서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는 스페인어로 쓰였지만, 필리핀 지역의 각 방언으로 번역되어서 널리 전파되었는데,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타갈로그어로 이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각국의 언어로도 번역되었는데,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다. 




▲ 필리핀 마닐라. 리잘공원(Rizal Park)



▲ Dr. Jose Rizal National Monument



필리핀 마닐라. 포트산티아고(Fort Santiago) 요새 



▲ 포트산티아고 안에 있는 호세 리잘 동상(Jose Rizal Monument)




▲ 인트라무로스 치노이 박물관(Bahay Tsinoy)





▲  치노이 박물관(Bahay Tsinoy)에서도 호세 리잘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 인트라무로스 안에 있는 일러스트라도(Ilustrado) 레스토랑 




※ 위의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https://www.officialgazette.gov.ph/

https://www.joserizal.com/

http://viaf.org/viaf/4184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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