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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뒷이야기]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독립선언과 미국의 배신

by 필인러브 2019.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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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내용은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野史)에 근거한 부분도 많습니다.


150여년 전 어느 날의 날씨에 대한 기록을 보기란 쉽지 않지만, 1869년 3월 23일의 카비테의 날씨만큼은 예외이다. 이날 마을에는 조용한 더위가 감싸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트리니다드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 오롯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째 진통이 계속되었지만, 아기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산파가 와서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지만, 트리니다드의 남편은 아이가 건강하게 나오기를 바라며 준비해두었던 폭죽을 터트리기로 했다. 팡팡,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고, 트리니다드는 이 폭죽 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y Famy)라는 이름을 붙였다.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 아이였다. 


▲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어머니와 그의 가족들


지방 소도시 카윗(Kawit)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어릴 적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부모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Trinidad Valerio Famy)를 만나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냈는데 글을 읽고 쓰는 방법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Carlos Jamir Aguinaldo)가 돌아가신 뒤 상황이 어려워졌다. 어직 어른이라고 보기 힘든 나이였지만, 아기날도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이 당시 아기날도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하는데, 소금을 비사야로 운송하기도 하고, 마닐라까지 카라바오 물소를 팔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스페인 군대에 강제 징병 되는 것을 피하고자 세금 징수를 하는 공무원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된 것은 마닐라 산토 토마스 대학을 다닐 때 호세 리잘이 지은 '놀리 메 탕헤레(Noli Me Tángere)'라는 제목의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스페인인들이 자국인들에게만 특혜를 주고 식민지 필리핀인들을 차별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 책은 당시 금서였지만, 청년 아기날도는 기꺼이 이 책을 손에 들었고, 호세 리잘을 바라보며 독립 투쟁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호세 리잘이 민다나오까지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리핀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조직한 민족주의 무장 투쟁 독립운동 단체인 카티푸난(Katipunan. KKK)에 가입하여 카비테 지역의 책임자로 일했는데, 1895년 카비테 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했다. 


1896년 8월, 카티푸난은 보니파시오의 주도 아래 '푸가드 라윈의 통곡(Cry of Pugad Lawin. 발린타왁에서 혁명을 외쳤음을 의미)'이라는 이름의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한 보니파시오의 군대가 승리하기란 어려웠다. 보니파시오는 스페인 군대에 크게 패배하여 퇴각하면서 아기날도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보니파시오의 지도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전투 지원을 중단한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의 혁명을 끝까지 도와서 보니파시오의 신뢰를 얻고 카티푸난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를 무능한 지도자로 몰아가서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쪽이 더 정확해 보인다.  1897년 3월 22일, 카티푸난은 보니파시오 대신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필리핀 공화국 혁명정부의 새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보니파시오는 독자적인 반란 정부를 만들려고 했으나,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의 정부를 인정할리가 없었다.  1897년 4월에 아기날도는 자신의 측근들을 보내 보니파시오를 체포했고, 카티푸난 비밀 재판에 회부한 뒤 반역죄를 이유로 총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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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비떼의 카윗(Kawit)에 있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태어났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이곳에서 필리핀 독립 선언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건물 뒤쪽으로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도 있다.



■ 1898년 6월 12일 필리핀 독립선언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듯한 기운이 있는 시기, 상황은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보니파시오가 죽은 이듬해, 1898년 6월 12일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고향인 카비테(Cavite)의 집에서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디자인 도안했던 필리핀 국기가 처음으로 공식 게양되던 날이었다. 호세 팔마(1876-1903)가 작사한 국가(National Song), 루팡 히니랑(Lupang Hinirang. 선택된 땅이라는 뜻)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변호사였던 바우티스타(Ambrosio Rianzares Bautista)가 쓴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이 나라의 인민들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라는 멍에를 참아내는 것에 질려버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였다. 하지만 이날의 독립 선언으로 필리핀이 실제 독립국이 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광복절이 아닌 삼일절에 가까운 날이었다. 가끔 필리핀에서 6월 12일을 독립기념일로 지내는 것은 역사 왜곡을 하는 것에 불과하며 7월 4일이 진정한 독립기념일이라는 주장을 듣게 되는데, 이날의 독립선언에 대해 그 국제사회의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역사책을 보면 "필리핀의 독립기념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다양한 날을 기념해왔다."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괴상한 설명에 대한 이유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1962년도 이전까지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지내다가, 마카파갈(Diosdado Macapagal) 대통령 시절에 6월 12일로 독립기념일 날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1898년  6월 12일 당시 필리핀은 결코 스페인 혹은 미국, 그 어떤 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독립 선포 자체를 무효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미국과 스페인이 만나 제멋대로 파리조약(Treaty of Paris of 1898)을 체결하고 국가의 통치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몇몇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것을 놓고 진정한 국가 독립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1934년의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타이딩스-맥더피법(Tydings-McDuffie Act)이다. 이 법안을 보면 10년 후 필리핀의 완전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니, 이는 당시 필리핀은 완전 독립의 상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1898년도에 필리핀이 독립된 것이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실제로 정식적인 독립이 승인된 것은 1946년 7월 4일, 33대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시대의 일이었으니, 어찌 거의 반백 년에 가까운 필리핀의 미국 식민지 시대를 무시한 채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독립 선언 하나만 보고 필리핀이 독립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 고양이 쥐 생각하듯, 위대한 미국의 도움


필리핀 독립운동 지도자로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임시 혁명정부를 전국적인 정부로 구상했지만, 독립 정부의 힘만으로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897년 12월 15일 그는 스페인 총독과 협정을 체결했는데, 스페인이 자유주의적 개혁을 하는 대신 아기날도는 스페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필리핀을 영구히 떠나기로 하는 내용의 협정이었다. 아기날도와 다른 혁명 지도자들은 무력투쟁의 포기 대가로 홍콩으로의 망명과 40만 페소의 돈, 그리고 스페인의 실질적인 정치개혁과 자치 운동 허락 약속을 수용했다. 하지만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해 임시 정부를 구성한 뒤 스페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무기구입을 위해 썼고, 미국 사령관과 만나 필리핀으로 돌아가 스페인과 싸우는 미군을 돕기로 했다. 


스페인에 저항하기 위해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생각한 민족 해방 운동 방식은 "미국의 도움"이었다. 그리고 1898년 6월 30일 미군이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필리핀에 상륙하기 전까지도 미국이 도와주리라고 믿었던 듯하다. 어찌나 미국을 믿었는지,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 헌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는데 식민지를 두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겁낼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1890년대 당시 미국에는 필리핀의 독립보다는 자국을 위한 새로운 시장 개척이 우선이었다. 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되었던 금광의 금을 이미 거의 다 캐낸 상황에서 카우보이와 무법자가 활개를 치는 개척시대도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서부개척시대 미국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되었고 경제적 번영이라는 것이 이룩되었지만 급속한 산업화는 생산 과잉에 의한 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던 금빛의 시대가 사라져가고 있었으니, 미국은 필리핀을 발판으로 중국 시장 진출을 모색한다. 하지만 필리핀 혁명 정부에서 이런 미국의 속셈을 정확히 알기란 어려웠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독립된 필리핀의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로 하고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한 혁명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혁명 정부의 수도를 카비테에서 불라칸의 말로로스로 옮기기로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바라소아인 교회를 최초의 필리핀 의회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1899년 1월 21일에 불라칸 주의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에서 필리핀 제1 공화국의 기본법 말로로스 헌법(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1899)이 비준되었다. 1899년 1월 23일에는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서약을 하면서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


필리핀을 아시아 전체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기기로 삼기 위해 미국이 택한 방법은 돈이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에서 국은 스페인에 필리핀 양보의 대가로 2,000만 달러를 지급한다. 미국 전체에 자동차 수가 겨우 8천 대에 불과했다는 그 시절, 5센트 동전 한 개만 가져도 맥주 한 병이나 담배 한 갑을 살 수 있을 때였다. 피를 흘리는 대신 돈으로 필리핀을 산 미국은 원래 마닐라 항구만 장악하려고 했다고 한다.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 항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려는 독립투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이 마닐라항을 가지려면 필리핀 독립운동 세력을 저지하고, 필리핀 전체를 식민지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1898년 10월 28일,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재임 기간: 1897년 3월 4일~1901년 9월 14일)은 미군에게 필리핀 전체를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필리핀의 독립을 부인하고 필리핀 혁명정부에 인계하지 않고, "필리핀 제도는 미국의 자유로운 깃발 아래 놓여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로써 미국이 필리핀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필리핀 혁명 정부에 스페인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을 약속했었지만, 그 약속을 어기고 필리핀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정부는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9년 2월 4일,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필리핀을 점령하려는 미국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고 2월 6일 첫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필리핀 정부는 북쪽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아기날도는 1899년 11월에는 혁명군인들을 해체하고 무장 게릴라를 소집하여 미국에 대항했으나 계속 패했다. 그러다가 1901년 3월 23일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사벨라 주에서 미군에게 잡히게 된다. 1902년 7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 평정을 선언했고, 항전은 2년 만에 진압된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공식적으로 1902년 7월 4일에 끝났지만, 전쟁이 가져온 후유증은 컸다. 3년 반의 전쟁 동안 동원된 미군은 12만 6000명, 사망자는 4374명(쿠바전쟁의 10배 이상)이었다. 필리핀 반군 2만 명, 민간인 20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미군에 체포된 이후 아기날도는 미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며 필리핀인들에게 미국과 싸움을 중지하고 미국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해야만 했다. 필리핀 제1공화국이 해체된 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기로 하고 카비테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1901년 9월 14일,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을 암살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재임 기간: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이 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리스도의 품에서 태어나지 못한 불행한 미개인들의 삶은 고양된다"는 그의 신념은 필리핀에까지 적용되었다. 필리핀을 지배하지 않는 것은 필리핀의 운명을 필리핀인이라는 야만인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는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이 문명화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믿었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가지게 된 미국은 스페인보다 훨씬 더 진화된 식민지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과거 스페인이 했던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억압 대신에 필리핀인들의 환심을 사는 길을 택했다. 미국은 필리핀 사람들을 데려다가 꼭두각시 자치정부를 만드는 한편 "미국인의 가치관을 가진 필리핀 사람"을 만들고자 대중에게 영어 교육을 시행했다. 이런 식민지 정책 속에서 일러스트라도(Ilustrado) 중산층들은 경제적인 지위는 물론 정부의 참여와 식민지 사회에서의 무한한 발전을 약속받았다. 이들은 미국의 선전 활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에 발린 선의를 기꺼이 믿고 충성하였다. 카티푸난의 지도자들은 아기날도의 은퇴 후에도 계속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미구엘 말바르 등을 수반으로 하여 1912년까지 미국에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필리핀의 진정한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마닐라 조약이 체결되는 1946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재임한 1901년 11월, 필라델피아의 일간지인 필라델피아 레저(Public Ledger)의 기자는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희가극에 나오는 한가한 놀이가 아니다. 우리 군인들은 무자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남자고 여자고 어린아이고 할 것 없이, 반군 포로와 단순 체포자, 반군 활동 적극 가담자와 반군인 것으로 의심되는 자를 가리지 않고 10세 이상이면 다 죽여 버린다. 씨를 말리려고 작정을 한 것 같다. 필리핀 사람은 개보다 나을 것 없다는 생각까지 만연하고 있다" 



필리핀 카비테.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



■ 필리핀 생활 속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흔적 만나기 


- 퀘존의 SM City North EDSA 쇼핑몰 옆에 보면  베테랑 메모리얼 메디컬 센터(Veterans Memorial Medical Center)라는 이름의 병원이 있다. 1964년 2월 6일, 아기날도는 이 병원에서 관상동맥혈전증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4세였다. 

- 불라칸 말로로스의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에 가면 Museo ng Republika ng 1899 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볼 수 있다. 아기날도가 쓰던 마차도 전시되어 있다. 

- 카비떼의 카윗(Kawit)에 가면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을 볼 수 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태어났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으로 이곳에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무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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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 근교 여행] 카비테 카윗,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Aguinaldo Shrine and Museum)



▲ 필리핀 불라칸 말로로스. 바라소아인 교회(Barasoain Church)






※ 위의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2172101005&code=210100

http://www.koreatimes.com/article/815779

https://kr.usembassy.gov/ko/education-culture-ko/infopedia-usa-ko/history-ko/slavery-civil-war-westward-expansion-ko/

https://www.officialgazette.gov.ph/




[필리핀 역사 뒷이야기]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독립선언과 미국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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