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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 뒷이야기] 톤도 출신의 위대한 평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KKK)

by 필인러브 2019.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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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내용은 개인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으며, 정사가 아닌 야사(野史)에 근거한 부분도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먼 옛날, 1863년의 일이다. 1863년은 조선에서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으려 하던 해였다. 통상 수교를 거부했던 흥선대원군은 나라 밖 이야기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그해 런던에서는 세계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었으며, 노르웨이에서는 표현주의 화가 뭉크가 태어났다. 키가 193cm나 되었다던 미국의 16번째 대통령이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하고,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했던 것도 바로 1863년이었다. 그리고 1863년 11월 30일에는 마닐라의 대표적인 빈민가인 톤도에서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을 만큼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낼 아이였다. "위대한 평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 그 아이는 바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 y de Castro)였다.

스페인이 조금씩 힘을 잃던 무렵, 1863년 11월 30일에 톤토(Tondo) 빈민가의 작은 집에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가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재단사였고, 어머니는 담배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고 한다. 식민지 시절 가난한 집 5남매의 장손으로 태어난 보니파시오의 유년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결핵으로 부모까지 모두 잃었으니,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다 해야만 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을 형편조차 되지 못하였지만,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독학으로 프랑스혁명에 관한 책들 공부했고, 필리핀 법률책을 읽으면서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꿈꾸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런 가난함의 경험은 보니파시오에게 호세 리잘처럼 평화로운 방법을 가지고는 식민지의 고통을 끝낼 수 없다고 생각을 심어 주었다. 생존을 위해 험한 노동일을 하면서도 스페인 식민 통치 말기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던 보니파시오에게는 스페인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정도의 온건한 투쟁은 무의미했다. 그는 무장투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카티푸난(Katipunan)은 따갈로그어로 협회(association) 또는 '다 함께'라는 뜻의 의미가 있다. 비밀 혁명 단체 카티푸난의 정식 명칭은 Kagalang-galangang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 (Supreme and Venerable Association of the Children of the Nation)인데, 약자로 KKK라고 쓰기도 한다. 


■ 카티푸난(KKK)의 설립과 무장투쟁론

1892년 7월 3일, 호세 리잘은 필리핀 민족동맹(La Liga Fulipina)이란 이름으로 스페인 식민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비폭력저항 단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호세 리잘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리잘이 민다나오섬으로 추방되자 보니파시오는 호세 리잘처럼 민족의 독자성이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아폴리나리오 마비니 등 주변 사람들을 모아 비밀결사단체를 만들어 낸다. 바로 카티푸난(Katipunan. KKK)이었다. 카티푸난은 스페인 지배에 대항한 필리핀 독립운동 단체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추구하였다. 호세 리잘의 민족주의적 비폭력 저항 운동이 실패한 것을 본 KKK 비밀결사 단원들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무장하여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1896년까지 약 4년간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의 회원 확보에 힘썼는데, 단원들은 대부분 착취당하던 노동자와 농민이었다고 한다. 이들 단원들은 부유하고 보수적이던 중산층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는 출신 성분부터 달랐고, 급진적이며 과격한 성향을 띌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각지 로컬 혁명 조직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포섭하여 수만 명까지 단원을 늘렸는데, 초기에는 남성들만 단원으로 받아들였지만 나중에는 여성들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단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많이 간다는 식의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896년 5월에 카티푸난의 비밀회의가 열렸지만, 필리핀 독립운동은 그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보니파시오 쪽에서는 즉각적인 부장봉기를 주장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 쪽에서는 무기가 부족하니 날짜를 뒤로 미루자고 주장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직 내부에 반역자까지 등장했다. 이 비밀회의 석 달 뒤, 카티푸난의 움직임을 눈치챈 스페인 쪽에서 대대적인 검거 작업에 들어갔고, 수백 명의 조직원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 와중에 1896년 8월 28일 보니파시오는 혁명정부를 구성하여 대통령 겸 혁명군 참모총장에 취임했고, 다음 날 8월 29일 전국적인 무장봉기를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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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8월 29일의 봉기와 호세 리잘의 죽음

카티푸난은 퀘존 발린타왁에서 '푸가드 라윈의 통곡(Cry of Pugad Lawin. 발린타왁에서 혁명을 외쳤음을 의미)'이라는 이름의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독립 전쟁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봉기는 호세 리잘이 처형당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리잘은 카티푸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스페인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그해 12월 처형당했다) 독립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무기도 변변치 않은 카티푸난의 단원들이 정식 훈련을 받은 스페인의 군대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카티푸난의 독립군은 스페인 군대와의 교전에서 계속 패배했고, 마닐라를 떠나 북쪽 몬탈반으로 계속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니파시오는 산악지역으로 후퇴하면서 게릴라전술로 저항했지만,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운동이 계속되는 동안 카티푸난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니파시오의 지도력에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그 와중에 카비테 지역을 담당하던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전투 지원을 멈추었고, 스페인이 카티푸난의 비밀기지까지 색출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했다. 이 시기 카티푸난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의가 좀 있지만, 1896년 말에 보니파시오가 카비테까지 찾아가 아귀날도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아귀날도는 전투지원을 거절했고, 카티푸난 내부에서는 갖가지 소문만 무성하게 생겨났다. 그 소문 중에는 보니파시오의 출신 성분이 빈민가 쪽인 데다가 학력이 낮기에 혁명정부의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소문도 있었다. 결국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 내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 1863년 11월 30일 ~ 1897년 5월 10일

1897년 3월 22일, 카티푸난에서는 비밀회의를 열고 혁명 정부를 위한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되었다. 보니파시오를 지지하던 이들이 부정선거의 증거를 내세우며 선거의 무료화를 선언했지만, 아귀날도는 보니파시오 측근들의 입장을 통제한 채 대통령 취임식을 강행하기에 이른다. 아밀리오 아기날도의 새 대통령 선출과 카티푸난 회의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은 보니파시오는 독자적인 반란 정부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아귀날도가 이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1897년 4월, 카비테 지역을 떠나려고 준비하던 보니파시오에게 방문객이 찾아왔다. 아귀날도의 측근이었다. 보니파시오는 이들을 동료로 대접하였지만, 그날 밤 아귀날도의 측근에 의해 보니파시오의 일행은 모두 살해당한다. 이날 보니파시오의 아내가 아귀날도측 장군한테 겁탈당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보니파시오가 일행을 모두 잃은 채 체포되는 처지가 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보니파시오는 체포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고, 반역죄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형 판결을 놓고 정치적 목적에 의한 사법살인(legal murder)이라고 보는 역사학자가 꽤 많은데, 당시 재판에 있어 아귀날드 쪽의 측근만으로 재판관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보니파시오와 아귀날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을 놓고 서민층을 대변하는 보니파시오가 상류층을 대변하는 아귀날도에게 패배한 싸움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897년 5월 10일,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분티스 산에서 동생과 함께 총살되며 필리핀 독립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고작 34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다음 해, 1898년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 

■ 위대한 평민, 보니파시오

필리핀 독립에 대한 역사 기록들을 살펴보면 호세 리잘(1861년 6월 19일 ~1896년 12월 30일)이나 에밀리오 아기날도(1869년 3월 23일 ~ 1964년 2월 6일) 등보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1863년 11월 30일 ~ 1897년 5월 10일)가 더 대단한 인물로 보일 때가 많다. 영웅에게는 긍정적인 에피소드만이 부풀려 곁들어질 수 있음을 고려해도 어쨌든 그의 삶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이었던 호세 리잘과는 출발이 달랐다고 할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호세 리잘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호세 리잘이 유학 시절 아무리 고생을 했다고 해도 스페인의 식민지 시설 톤도 그 지역에서 가난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보니파시오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니파시오가 호세 리잘이 처형당하기 전에 남긴 '마지막 작별의 글'을 따갈로그어로 번역하였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보니파시오였다. 그가 오롯이 독학을 통해 언어와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는가. 그리고 그는 그가 얻은 지식을 머릿속에만 두는 인물이 아니었다. 보니파시오는 필리핀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무척 많은 글을 썼지만, 자신의 글을 종이에 적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쓴 글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의 행적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보면 보니파시오는 그저 입으로만 떠드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로 보인다. 보니파시오는 반역죄로 몰려 총살당했던 그 날까지도 늘 행동하는 영웅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노력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서 그 노력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가 혁명의 전사로서 일구었던 많은 일을 보면 남의 나라 영웅이지만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저절로 나온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처형 이후 벌어진 일들이다. 반역죄로 총살당했던 보니파시오의 시신은 방치되어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지지 못했다. 보니파시오 사후에 그의 부인이 한 달 넘게 산속에서 시신을 찾아 헤맸다는 것은 퍽 유명한 일화로 나중에 그 이야기가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정도이다. 게다가 보니파시오가 죽은 뒤 상당히 많은 혁명군이 아귀날도에 환멸을 느껴 조직을 떠났고, 카피푸난 조직은 조직 간의 통합된 명령 체계를 잃고 와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죽고 난 뒤 영웅 호칭이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반역자였던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국가 영웅이 되기까지는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논쟁과 시간이 필요했다.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독립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게 된 것은 그가 그렇게 비극적인 총살을 당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뒤였다. 





■ 필리핀 생활 속에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흔적 만나기

-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얼굴을 보려면 5페소 동전을 보면 된다.
- 보니파시오가 필리핀 혁명의 아버지로 인식되면서 필리핀 육군 본부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도 바뀌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전하다고 평가되는 "포트 보니파시오(Fort Bonifacio)"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 필리핀에서는 매년 11월 30일을 보니파시오 데이(Bonifacio Day)로 정하고 필리핀의 국경일로 삼고 있다. 보니파시오가 처형당한 과정을 생각해 보면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보니파시오가 죽었던 날이 아닌 태어난 날을 국경일로 삼은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 마닐라 시청(Manila City Hall) 앞에 가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벽화(Andres Bonifacio Murals)를 볼 수 있다.
- 마닐라 우편 박물관(Postal Museum) 앞을 보면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기념비(Andres Bonifacio Monument)가 있다.
- 카비테의 마라곤돈(Maragondon) 지역에 가면 'Museo ng Paglilitis ni Andres Bonifacio' 와 'Bonifacio Shrine' 등의 유적지에 가볼 수 있다. 보니파시오에 대한 재판이 마라곤돈에서 있었음을 기억하기 위한 유적지이다.



▲ 필리핀 마닐라 마닐라 시청(Manila City Hall).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벽화(Andres Bonifacio Murals) 



▲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기념비(Andres Bonifacio Monument - Lawton)



▲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 보니파시오 하이스트리트 




※ 위의 내용은 아래 자료를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https://www.officialgazette.gov.ph/





[필리핀 역사 뒷이야기] 톤도 출신의 위대한 평민,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K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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