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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자신감을 주는 대왕 바나나

by 필인러브 2020.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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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러니까 내가 나도 나이가 든다는 것을 아직 모를 때, 그래서 나이가 듦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인식할 때, 어느 어르신이 말씀하시기를 나이가 들어서 아쉬운 것 중 하나는 호기심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줄어들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점점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지만, 호기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착실히 나이를 먹어가는 이 와중에도 신기한 것을 보게 되는 날이 생긴다.


중국산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모두 수명이 짧은 것은 아닌가 보다. 코로나19 확진자는 매일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연일 비슷한 뉴스가 올라오니 사람 마음만 무덤덤해질 뿐이다. 적응과 포기 중 어느 단어가 더 적합할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 마닐라 거리 곳곳은 예전과 거의 비슷한 모양새이다. 예전과 비교해 쇼핑몰 방문객은 확실히 줄었다고 하지만, 길거리 노점상은 다시 사람들로 북적이고, 도로 공사는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모두 어디를 가는 것인지 EDSA 주변으로 차가 잔뜩 막힌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생활 방역 수칙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니면서 평상시처럼 생활하고 있으니, 코로나 확진자가 줄어들 리가 있나. 


사람 많은 쇼핑몰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 요즘, 편의점 앞에 나갔다가 아이 엄마가 어린아이를 안고 구걸을 하러 달려오는 것을 보고 뒷걸음질로 도망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깟 동전 몇 푼이 아깝지는 않지만, 마스크도 쓰지 않는 채 달려오는 사람을 가까이하기는 좀 무섭다. 집으로 돌아와서 뒤숭숭한 마음으로 그래도 동전을 좀 줄 것을 그랬나 잠깐 후회를 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아이 엄마 근처에 가는 것은 꺼려졌다. 어쭙잖은 동정심에 가까이 갔다가 바이러스에라도 걸리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것인가. 어쩌다가 이렇게 동전 몇 개를 선뜻 내주지 못하는 상황이 왔을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쌀을 씻어 저녁밥을 했다. 왕완딩 씨가 채소며 바나나 배달을 온다고 했으니, 따뜻한 도시락을 준비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도시락을 넘겨받고 바나나를 건네주는 왕완딩 씨의 목소리가 사뭇 활기찼다. 드디어 내가 만족할 만큼 아주 큰 바나나를 사 왔다는 것이다. 언젠가 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볼품없는 바나나를 사 왔기에 시큰둥한 목소리로 바나나는 무조건 큰 것이 좋다고 말해준 뒤로 완완딩 씨는 리베르타드 시장에서 가장 큰 바나나를 사다 주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바나나를 논하다니? 고개를 갸웃대며 집으로 돌아와서 비닐봉지를 풀어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바나나가 진짜로 컸던 것이다. 대체 무슨 품종인지는 몰라도 바나나가 정말 커서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이다. 이런 바나나가 주렁주렁 열리면 수확하는 농부는 얼마나 마음이 뿌듯할까. 온 동네 가득 바나나가 노랗게 익어가던 소르소곤의 숲을 마음껏 걷던 때가 마치 꿈결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자신감을 주는 대왕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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