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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여행하기/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코로나19 시대, 나만의 특별한 배달원


"토요일에는 시장에 가보고 에스파다(갈치)를 사다 줄게!"

일전에 사 온 바나나는 너무 작아서 세 개씩 먹어야 했다고 알려주고 커다란 바나나를 사달라고 부탁을 하기는 했지만, 요즘과 같은 때에 시장에 큰 바나나가 있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완딩 씨가 내게 내민 것은 정말 커다란 바나나였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크고 싱싱한 바나나를 어디서 구했을까, 바나나 꾸러미를 내미는 왕완딩 씨의 얼굴에는 성공적으로 바나나를 사 온 안겨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비싸다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기가 바나나값을 올린 것도 아니건만, 바나나가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하지만 왕완딩 씨가 시장의 과일 좌판을 모두 돌아보고 품질이며 가격을 꼼꼼하게 비교했음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주변 10km 이내 반경에서 이처럼 좋은 바나나를 가진 사람은 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알빈 아저씨가 코로나19도 중국산이라 오래가지 않으리라 기대한다고 하였건만, 코로나19는 메이드인차이나 주제에 수명이 길기도 했다. 4월 끝자락이 되면서 커뮤니티 쿼런틴 앞에 인핸스트(enhanced)가 붙었을 때와 제너럴(general)이 붙었을 때의 차이점까지 알게 되었지만, 격리조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필리핀 정부에서 격리조치 명령을 끝낸다고 해서 당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외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년이나 되어야 예전과 같은 생활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의 이야기가 낭설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코로나19가 가져온 가장 고약한 것은 사람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ECQ 격리기간이라고 하여 시장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감염자인지 알 수가 없으니 스쳐 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지 40일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편의점을 두 번 다녀온 것 외에는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고, 온라인 쇼핑과 왕완딩 씨의 도움으로 식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몸에 비타민이 없어서 귤이 먹고 싶어졌다거나 꽈배기를 구웠다는 핑계를 대고 왕완딩 씨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런저런 배달을 부탁하고 있지만, 사실 왕완딩 씨가 배달해주는 물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왕완딩 씨나 왕송천 씨는 짐작조차 못하는 눈치이지만, 마닐라의 고급 식료품점은 모두 문을 열고 배달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슈퍼마켓 앞의 줄이 낙동강 물줄기처럼 길다고 해도, 돈만 있다면야 한국 슈퍼의 총알 배송을 받으면 그뿐이다. 그러니까 왕완딩 씨의 배달은 내게 있어, 그리고 왕완딩 씨에게 있어 생활의 활력에 가까웠다. 매우 의외이지만, 그리고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 집까지 배달을 해주는 일이 왕완딩 씨에게도 꽤 기분전환이 되는 모양이었다.


비닐봉지 안에서 바나나의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지만, 바나나보다는 친구가 그리웠던 나는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고 짧은 대화에 몰두했다. 그놈의 코로나바이러스가 뭔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기 위해 나와 왕완딩 씨의 거리는 어정쩡하기만 했다. 멀지만 가까운 혹은 가깝지만 먼 거리를 유지하고 마스크를 쓴 채 서 있어도 오랜 친구와의 대화란 즐겁기 그지없다. 온종일 가게에 앉아 두런두런 수다를 떨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대화의 양을 최대한 줄여야 함이 아쉬울 뿐이다. 서로의 눈빛을 보면서 대화에 비하면 페이스북 메신져 대화란 얼마나 무미건조하단 말인가. 방금 말을 배운 아이처럼 경쾌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림을 기뻐하며 순식간에 서로의 근황에 관해 떠드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행복이 물결쳤다. 내 기쁨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완딩 씨가 이제 가게에 가봐야 할 시간임을 알려왔다. 늠름한 모습으로 다음 배달을 약속하는 왕완딩 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잘 익은 노란 바나나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면서, 이런 시기에 내 냉장고 사정을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다니 내 인생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 밀가루를 좀 사다 달라고 했더니, 슈퍼가 아닌 시장에 가서 비닐봉지에 담은 밀가루를 사 왔다. 이렇게 봉지에 담아 파는 밀가루는 1kg에 40페소이다. 노란색은 Mantikilya 라고 부르는 버터인데, 버터라기보다는 마가린에 가깝다. 포장이 허술하지만, 가격이 싸다. 저 엄청난 양이 47페소이다.



▲ 필리핀 사람들도 꽈배기를 만들어 먹는다. shakoy 라고 하는데, 싸고도 맛 좋은 간식이 된다. 하지만 외출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꽈배기가 먹고 싶으면,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한다.



▲ 꽈배기를 튀기면 더위가 어깨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꽈배기는 격리 기간이 끝나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잡채를 만들어서 당근이며 양파와 BARTER(물물교환)를 했다. 최선을 다했건만, 후추와 간장이 더 필요한 맛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코로나19 시대, 나만의 특별한 배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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