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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메트로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생활] 커다란 소시지 대신 녀석이 고른 것

by 필인러브 2020.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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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첩이 문 옆에 떨어졌어!"

"괜찮아요. 난 케첩 안 좋아해요!"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주관이 뚜렷한 녀석에게 타깃이 되면 도무지 헤어날 방법이 없다. 편의점에는 손님이 세 명이나 있었지만, 녀석은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동전을 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해봤지만, 아침부터 굶어서 배가 고프다나 어쨌다나.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 벼르고 벼르다 편의점에 나온 것인데 이래서야 물건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나는 아이에게 지금 동전이 하나도 없으니 일단 저쪽으로 좀 가 있으라고 이야기한 뒤에야 맥주를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럭저럭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하면서 편의점 직원에게 소시지와 밥을 함께 주문했다. 그리고 소시지는 꼬마 녀석에게 주면 된다고 했더니 요 녀석, 화들짝 놀라면서 하는 이야기가 다른 것을 먹고 싶단다. 소시지 말고 먹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뭘 먹고 싶은 것일까 싶어 그럼 한번 골라보라고 말을 했더니,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진열장을 바라본다. 커다란 소시지 대신 녀석이 고른 것은 해시 브라운 감자튀김이었다. 내가 고른 소시지 쪽이 훨씬 영양가가 있을 터인데 싶었지만,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지간히 넉살이 좋은 녀석이었다. 편의점 직원이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일러주자 그제야 큰 목소리로 땡큐를 하더니, 땡큐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편의점 직원에게 감자튀김은 몇 개 주는 것인지 묻느냐고 정신이 없다. 그리고 감자튀김의 개수 확인이 끝나자마자 나를 바라보면서 음료수도 사주면 안 되냐고 졸라대기 시작한다. 요즘은 외출하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으니 구걸하는 일이 더 어렵기도 하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음료수를 하나 골라보라고 했더니,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날듯이 냉장고로 달려갔다. 


마음이 바뀌면 곤란하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순식간에 녀석이 가져온 것은 2리터나 되는 커다란 스트라이트였다. 기껏해야 작은 콜라 한 병 집어올 줄 알았는데 배포도 크다. 꼬마 녀석에게 음료수 하나 사주지 못할 이유야 없지만, 장난삼아 너무 큰 것을 가지고 왔다고 나무랐는데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작은 것으로 바꿔오라고 네 번이나 이야기해도 내 시선을 피하면서 치약 쥐어짜는 목소리로 지금 자신은 목이 아주 마르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고장 난 장난감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녀석과 나의 대화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편의점 직원이 손님과 함께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야무진 녀석에게 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편의점 직원에게 계산을 부탁했다. 뜻하지 않은 수확이 기쁜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편의점을 나온 아이는 가게를 나오자마자 길바닥에 주저앉더니 성급하게 밥그릇을 열었다. 그리고는 편의점 문 앞에 케첩을 떨어트렸다고 알려주는 내게 케첩을 좋아하지 않아서 괜찮다며 자신의 식성을 알려준다. 케첩도 없이 맨밥에 감자튀김을 무슨 맛으로 먹을까 싶었지만, 본인이 그게 좋다면야 쥐코밥상도 임금의 수라상 부럽지 않은 성찬이 될 터이다. 나는 아이에게 식사 잘하라고 인사하고, 내 소중한 맥주를 손에 쥐고 후다닥 집으로 달려갔다. 망할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한 달 넘게 맥주를 한 방울도 마셔보지 못했던 것이다. 




  

[필리핀 마닐라 생활] 커다란 소시지 대신 녀석이 고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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