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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항공 역사] 마닐라공항 이야기 - ③ 우리가 가진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 니노이 아키노

by 필인러브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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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oy Aquino Monument - Makati City

 

1932년은 이탈리아에서 제1회 베니스 영화제가 개막한 해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9,000km 넘게 떨어져 있는 한반도는 한가롭게 영화제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치며 도시락 폭탄을 던져 총살형을 당하고 있었으니, 잔인한 시절이었다. 

그해 11월 27일의 일이다. 앙헬레스 위쪽에 있는 딸락(Tarlac)의 컨셉션(Concepcion)에서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부유한 정치가 가문으로 유명했던 아키노 가문의 귀한 아들이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의 혁명군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와 KALIBAPI 정당의 사무총장이었던 아버지(베니그노 아퀴노 시니어) 아래에서 아이의 유년 시절은 즐겁게 지나갔다. 하지만 아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 세계가 열병과 같은 전쟁으로 뜨겁던 때였다. 아이는 아테네오 대학(Ateneo de Manila University)을 다니고 있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세상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열일곱의 나이였지만, '마닐라 타임즈' 신문사에 취직하여 최연소 종군기사로 한국 전쟁에 대한 기사를 썼다. 아이는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기자로서의 재능을 보였지만, 신문사를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리고 곧 화려한 정치 기록을 세운다. 1955년 선거에 나가 불과 22살의 나이에 컨셉션(Concepcion) 지방의 시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그리고 27세엔 부지사, 29세엔 도지사, 34세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계속하여 최연소 당선 기록을 세웠다. 정치 혼란기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정치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에게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끊임없는 비평을 일삼던 젊은 정치인은 눈엣가시에 불과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정치적 탄압이 시작되었고, 결국 그는 50세의 나이에 암살당하게 된다.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저항하며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긴 남자,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베니그노 시메온 니노이 아키노 주니어(Benigno Simeon Ninoy Aquino Jr.)였다.

 

# 니노이 아키노와 필리핀 민주화 운동 

1972년 9월 21일의 일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며 유례없는 폭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르코스는 계엄령 선포와 함께 니노이 아키노를 체포하는데, 살인 및 불법 총기 소지가 체포 혐의였다. 니노이 아키노는 무려 7년간 감옥에 수감되게 되지만 감옥 안에서도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40여 일이 넘는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부정 선거에 항의했는데, 1975년에 이르러 굶주림으로 아사 직전에 직면했음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키노에 대한 재판은 계속되었고, 1977년에 군사위원회에서는 아키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해에 아키노는 감옥에서 필리핀 의회 선거 출마까지 감행하게 된다. 선거에서 아키노는 1978년 선거에서 패했지만, 사형선고는 마르코스 대통령에 의해 사면될 수 있었다.

1980년의 3월은 니노이 아키노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아키노는 감옥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켰는데, 병원(Philippine Heart Center)으로 이송되었지만, 수술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의료진 측에서 수술에 대한 부담으로 진료를 꺼린 것이다. 아키노 입장에서도 마르코스가 어떤 술책을 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키노는 마르코스에게 심장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기를 청했고, 마르코스는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키노의 출국을 허락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아키노는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 참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르코스와의 약속에 대해 "악마와 맺은 약속은 약속으로 볼 수 없다(a pact with the devil is no pact at all)"고 하면서 필리핀의 민주화를 위한 강연과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 우리가 가진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 

1983년 8월, 여의도에 6.25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만남의 광장' 만들어졌다고 대한민국이 들썩이던 그때 필리핀 역사에 있어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니노이 아키노는 미국에 있었지만, 조국인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필리핀 땅을 밟는 순간 감옥에 투옥되거나 살해당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키노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1983년 8월 21일, 니노이 아키노는 귀국 길에 공항에서 암살당한다. 마르코스 정부에서 파견한 경호원이 지켜보고 가운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저격범이 쏜 총알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게 된 것이다.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공항에서 암살당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필리핀 국민들에게 퍼졌다. 당시 마르코스 정부는 암살범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으나 어린아이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니노이 아키노의 죽음으로 필리핀은 대혼란으로 빠졌다. 아키노의 묘소는 퀘존 시티에 있던 그의 집에서 마련되었는데, 아키노의 가족들은 아키노의 총상 자국을 숨기지 않았다. 장례식이 있는 8월 31일까지 아흐레 동안 수천 명의 사람이 아키노의 피 묻은 몸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운 공기가 가득 차 있던 그해, 니노이 아키노의 장례식이 있었던 8월 31일은 유난히 무덥고 습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퀘존의 산토 도밍고 교회(Santo Domingo Church)에서 있었던 아키노의 장례식을 보고자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애석하게 죽은 고인을 추모하며 사람들은 퀘존에서부터 리잘 공원까지 행진했고, 마르코스를 규탄하며 독재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일은 필리핀 민주화의 시발점이 됐다. 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장기집권은 무려 21년간이나 계속되었으니, 필리핀 민주화운동이 갈 길은 멀기만 했다. 사치의 여왕 이멜다(Imelda Romualdez Marcos)가 퍼스트레이디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는 많은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피플 파워'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폭발한 것은 1986년도가 되어서였다. 나중에 마닐라공항은 그 이름을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NAIA. Ninoy Aquino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바꾸지만, 이것 역시 5년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니노이 아키노 암살 당시의 기록 (출처 : Mr & Ms, American Historical Collection, Rizal Library, Ateneo de Manila University ) 
니노이 아키노 장례식. 그를 추모하려고 몰려든 사람들 (이미지 출처 : Presidential Museum and Library ) 
구두박물관(Marikina Shoe Museum)
▲ 마르코스의 부인인 이멜다는 필리핀의 경제를 거덜 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수천 켤레의 구두로도 유명한데 하루도 같은 구두를 신은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마리키나 시티(Marikina City)에 가면 이멜다가 소장했던 구두를 전시한 구두박물관(Marikina Shoe Museum)이 있다. 
필리핀 마닐라공항 터미널1. 니노이 아키노가 암살당한 곳은 터미널1의 11번 게이트 주변이라고 한다. 
니노이 아키노 기념탑(Ninoy Aquino Monument). 니노이 아키노를 기리기 위해 아얄라 트라이앵글 공원 바로 옆에 세워졌다. Ayala Avenue와 Paseo de Roxas 모퉁이에 있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그가 암살당한 8월 21일을 국경일(Ninoy Aquino Day)로 삼고 있기도 하다. 
마닐라공항 터미널1 

 

[필리핀 항공 역사] 마닐라공항 이야기 - ③ 우리가 가진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대통령, 니노이 아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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