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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생활/피나투보 타루칸마을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성가신 유리컵과 사진 인화 서비스

by 필인러브 2019.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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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루칸 사람들에게 유리컵을 선물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어른들 말씀을 잘 듣지 않는 아이였음이 틀림없다. 어릴 적 할머니가 내게 해주신 가르침 하나가 바로 물건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제대로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 같으니 하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지나친 욕심을 내고는 후회하는 일이 지금도 종종 생긴다. 완전 특가의 유리컵을 발견한 덕분에 유리컵을 320개 사는 것에는 큰돈이 들지 않았지만, 상자의 부피가 엄청났다. 게다가 비가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하늘은 비를 가득 품고 머리 위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내게 아주 큰 비닐봉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파사이 리베르타르 시장의 비닐봉지 가게 언니가 "슈퍼 사이즈 플라스틱"을 달라는 내게 "슈퍼 플라스틱"은 없지만 "울트라 메가 플라스틱"은 있다면서 건네준 커다란 비닐봉지였다. 지갑 속에서 20페소 두 장을 꺼내 팁으로 내밀고, 주차장에서 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상자를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었지만, 과연 타루칸 마을까지 유리컵을 온전히 가지고 갈 수 있을지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나쁜 습관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감사한 일이 잔뜩 생긴다. 하늘에서 대책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클락을 지나 타루칸 마을 가까이 가자 빗방울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필리핀 날씨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꾸물대지 않고 마을에 다녀오기로 했다.


우기라서 비가 오면 어쩌나 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좋을지 고민했다는 중국 기나라 사람과 같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잠이 좀 왔다는 것 외에는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참 좋은 아침이었다. 공기가 어찌나 맑은지 이런 상쾌한 날씨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앞으로 백 번 정도만 더 있었으면 싶을 정도이다. 덜컹대는 4X4 사륜구동차 구석에 앉아 엉덩이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코가 벌렁대며 콧구멍이 커졌다. 바람 속에 희미하게 비의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그 냄새는 풀 냄새에 가까웠다. 화산 먼지 가득한 황폐한 들판에서 숲속의 풀 냄새가 난다니 기묘한 일이지만, 땅이 품고 있는 숲의 기운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풀 냄새보다 더 반가운 것은 꼬마 녀석들의 얼굴이다.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흩날리면서 티나파이(빵)를 외치면서 카라바오 소의 등에 올라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이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니, 마을에 가는 일을 멈추기 어렵다.  


타루칸 마을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일손 돕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꼬마 아이들이 우르르 와서 짐을 나르겠다고 했지만, 삐또이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유리컵을 선뜻 맡길 리가 없었다. 아저씨가 마을로 무전기로 쳐서 뭐라 뭐라 하였더니 동네 청년들이 잔뜩 내려와서 짐 나르기를 돕기 시작했다. 클락 퓨어 골드에서 타루칸 마을의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유리컵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하나도 깨지 않고 배달하는 것에 성공했다. 배달에 성공했음보다 기뻤던 것은 내가 유리컵을 가지고 왔다는 소식에 마을 아낙네들이 격하게 기뻐해 주었다는 것이다. 유리컵 하나라도 쓸만한 것이 생긴다는 것이 좋은지 다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데, 쌀을 배달했을 때만큼이나 반가워한다. 나는 이 와중에 컵을 주지 않고 그냥 들고 가면 세계의 멸망을 꿈꾸는 악당처럼 욕을 먹겠다고 농담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유리컵을 선물로 받길 거부하면 매우 곤란한 것은 내 쪽이었다. 유리컵을 마닐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 나는 동네 아저씨에게 가지고 간 짐을 가족 수에 맞추어 80개로 나누기를 재촉했다. 그리고 재빨리 가지고 간 물건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성가신 유리컵을 없앴다. 내가 오전 7시까지 피나투보 화산 일대에서 가장 많은 유리컵과 판데살 빵을 가지고 있던 부자였다고 하지만, 혼자서 수백 개의 유리컵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원래 이런 부자의 자리란 매우 부질없는 것이니, 무겁고 불필요한 유리컵 대신 싱싱한 생강 한 봉지를 선물로 얻었다. 아직 땅속의 기억을 품고 있을 생강에서 흙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가방 속에 있던 과자 한 조각까지 다 나눠준 나는 무거운 짐이 없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생강차를 진하게 끓여 내 멋진 텀블러에 담아 마실 계획을 세웠다. 





▲ 햄 한 조각을 원하는 알빈 아저씨네 댕댕이. 이 녀석은 참을성이 엄청나다.   




▲ 삐또이 아저씨




▲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 타루칸 마을로 가는 길








▲ 타루칸 마을 아이들. 언덕을 뛰어 내려오는 발걸음이 어찌나 경쾌한지 모른다.






▲ 굿모닝! 좋은 아침! 



▲ 언덕에 올라가다가 진흙을 잔뜩 밟아서 발을 씻으려고 수돗가에 갔더니, 내게 물만 한 바가지 주고 비누는 주지 않았다. 내가 기부했던 비누가 분명한데, 비누는 빌려주지 않는다. 비누가 아까워서라기보다는 발 따위를 씻는 것에 세숫비누를 쓰는 일은 하지 않는 듯했다.




▲ 요 녀석, 아기 발이 어찌나 예쁜지 모른다.



▲ 아기 발만 사진을 찍었더니 아기 엄마가 서운해 하여서 얼굴도 찍었다. 



▲ 타루칸 꼬마 녀석들의 옷에는 늘 땟국물이 흐르지만, 산에서 뒹굴고 놀다 보면 누구나 금세 그렇게 될 터이다.



▲ 타루칸 최고의 머리빗 패션 



▲ 유리컵을 나눠 보아요 




▲ 원래 사진 모델이 되는 일을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타루칸 아이들이지만 요즘은 더 적극적으로 모델 활동에 임하게 된 것은 아이들이 종이로 된 사진을 가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보면 안 그래도 동그란 눈동자가 더욱더 둥글어지면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제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 가지는 일이 뭐 저렇게나 좋을까 싶지만, 마을로 오는 방문객 대부분은 사진만 찍어갈 뿐 그 사진을 가져다 주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사진 인화 서비스는 매우 인기가 좋아서,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따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이니, 무료라서 그렇지 손님 확보에는 확실히 성공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 포토 프린터를 써서 사진을 인화하는 것은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작은 수고에 비해 마을 사람들이 보여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 장씩 사진을 가지게 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 나의 울트라 메가 플라스틱 비닐봉지는 운이 좋았다. 구멍이 나도 버려지지 않고, 아이들의 멋진 장난감이 되었다.







▲ 타루칸 마을을 떠나 산타 줄리아나 마을로 돌아가는 길






 산타 줄리아나 마을 근처에서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군사훈련이 있었다. 헬리콥터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엄청난데 카라바오 소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성가신 유리컵과 사진 인화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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