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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구석구석/피나투보 타루칸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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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로사 파파의 그린 파파야 수프 (아이따족 원주민 집구경) 뭐든 자주 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타루칸 마을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군사 훈련이 있다고 마을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면 할 일이 없어 빈둥대기 일쑤였지만, 요즘 나는 군사 훈련이 있다고 하면 바로 로사네 집에 쪼르르 가버린다. 아이들 노는 것도 보고, 어슬렁대며 마을 사람들 집도 구경하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말랑한 뱃살을 만질 기회도 얻는다. 쌀을 가져다주어도 시원찮을 판이지만, 밥도 얻어먹는다. 일전에 사다 준 소금이며 설탕을 다 먹었을지 궁금하여 앞집 부엌에 들어갔는데, 로사와 꼬마 녀석들이 동네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사진 촬영의 기회로 여겼다. 때아닌 가족사진 촬영이 힘들어서 집 구경을 그만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로사가 꽤 신난 모습이라 잠자코 함께..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아이따족 꼬마 아이들의 구슬치기 남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만 중요한 날이 있다. 바로 나의 멋진 생일이다. 하긴, 필리핀 사람만큼은 중요하게 여기지는 못한다. 세상에 필리핀 사람만큼 자기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으니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대출까지 받는 사람들이 필리핀 사람들이다. 필리핀에 사는 인도 사람들이 주로 하는 활동 중 하나가 '붐바이 파이브 씩스 론(bombay 5-6 loan)'라고 부르는 일수놀이인데, 1,000페소를 빌리면 1,200페소를 갚아야 하는 식의 고리대금업이다. 이자가 상당히 비싸지만 필리핀 사람들이 붐바이의 돈을 쓰는 것은 대출받기가 은행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인도사람 돈은 갚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알려져 있고 ..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55kg의 접시와 작달비 "이 접시는 얼마예요?""잠깐 저울에 재보고 알려줄게." 2NE1이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불렀을 적의 이야기이니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일로일로 다운타운에 갔다가 아주 어여쁜 그림이 그려진 접시를 발견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릇은 내 관심사가 아니지만, 발걸음을 멈춘 것은 친구네 집에서의 저녁 식사가 생각나서였다. 당시 매우 친하게 지내던 친구네 집에 가서 밥을 함께 먹었는데, 이 친구는 정말 극도로 가난한 친구였다. 어찌나 가난한지 나에게 접시를 주고 나니 자신은 그릇이 없어서 일회용 반찬 뚜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밥을 먹어야 했다. 다음에 또 놀러 갈 때를 대비하여 친구에게 산뜻한 접시를 선물하고자 접시 가격을 물었는데, 가게 주인이 개당 개수가 아닌 kg당 개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돼지고기..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마리아 아주머니와 왈라 바왈 라플 나의 사랑스러운 타루칸 마을 꼬마 녀석들은 내가 상자를 들고 "라인" 이라고 외치면 재빨리 학교 교문 앞에 가서 줄을 서는 일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아이들 입에 달콤한 초콜릿 과자를 넣어주고 싶어 "라인!"을 외치느냐고 바쁜데 수바릿 아저씨가 내게 와서는 종이봉투를 보여주면서 제법 심각한 얼굴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마을에 올 때마다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는 아저씨라서 초콜릿 과자 나눠주는 일을 로사 아빠에게 맡겨놓고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수바릿 아저씨 이야기가 재미있다. 자신이 봉투 가득 카모테(고구마 비슷한 구황작물)를 가져다줄 터이니 가방을 바꾸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카모테의 상태가 매우 좋다는 아저씨의 이야기는 내게 별로 솔깃하지 않았지만, 아저씨 얼굴에는 가방을 꼭 가지..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산타 줄리아나 마을의 작은 빵 가게 필리핀 시골 마을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작은 빵 가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새벽 일찍 일어나서 힘을 합해 빵을 굽고, 어린아이들까지 가족들이 모두 합세하여 돌아가며 가게를 지키는 빵 가게 말이다. 온종일 가게 문을 열어도 5페소 또는 6페소짜리 빵을 팔아서는 부자가 되기 힘들겠지만, 가족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소박하게 살아갈 정도는 될 것이었다. 아직 가게 간판조차 갖추지 못한 작은 빵 가게였지만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산타 줄리아나 마을과 같은 작은 마을에 새로 가게가 생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서 간판이 없어도 가게 홍보는 저절로 된다. 나와 같은 여행객도 빵 가게가 새로 생겼음을 알아챌 정도이니 마을 사람 모두 알 것이 틀림없었다. 대도시 마닐라였다면 사람들이 한창 바쁘게 움직일 저녁 ..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성가신 유리컵과 사진 인화 서비스 타루칸 사람들에게 유리컵을 선물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어른들 말씀을 잘 듣지 않는 아이였음이 틀림없다. 어릴 적 할머니가 내게 해주신 가르침 하나가 바로 물건에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제대로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 같으니 하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지나친 욕심을 내고는 후회하는 일이 지금도 종종 생긴다. 완전 특가의 유리컵을 발견한 덕분에 유리컵을 320개 사는 것에는 큰돈이 들지 않았지만, 상자의 부피가 엄청났다. 게다가 비가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하늘은 비를 가득 품고 머리 위까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내게 아주 큰 비닐봉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파사이 리베르타르 시장의 비닐봉지 가게 언..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마음의 가난을 막으려면 내 취미는 잡다한 글쓰기인데 사실 그게 직업이기도 하다. 내가 기대하는 만큼 글이 신통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신통하지 않은 글에 대한 수요도 있기 마련이라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꽤 운이 좋은 편이지만, 하기 싫어하는 것을 꼽으라면 그 역시 글 쓰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건 언제 무엇에 대한 글을 쓰느냐의 문제이다. 내가 쓰는 글이란 것이 대부분 블로그용 짧은 글이나 간단한 잡지 기사 따위라서 편하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멋진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무언가 뚝딱 완성되지는 않는다. 특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온종일 끙끙대며 커피만 하염없이 마시는 일이 생겨난다. 마지막 문장에서 막혀서 마무리하지..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멈춤을 아는 만족이란 무엇인가? 내가 타루칸 마을 사람들을 좋아하는 까닭에 대해 굳이 적어보자면 이유는 간단하다. 나를 웃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족을 배신할 만큼의 돈이나 돈을 버릴 만큼의 가족이 없는 데다가 절세 미인도 아니고 무엇인가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단한 일로 기뻐하려면 기뻐할 일이 너무 띄엄띄엄할 인생을 사는 터라 사소한 일에도 즐거워하도록 노력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타루칸 마을에 머물 때만큼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배울 것도 많다. 타루칸 마을 사람들이 식빵 80개를 세는 일에도 한참 걸리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식빵 80개를 나눌 때는 10개씩 8줄로 만들어 세면 편하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기는 해도,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