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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구석구석/피나투보 타루칸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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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화살과 티나파이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물안개가 광활한 들판을 가득 감싸고 있었다. 하늘은 이내 푸르게 개었지만, 안개 덕분에 길이 참기름을 바른 듯 미끄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타루칸 마을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지만, 언덕길이 온통 크고 작은 돌투성이라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언덕을 오르기 쉽지 않다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견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따족 아이들은 날아가듯 뛰어가서는 "나를 잡아보세요!"라며 나를 놀리곤 했다. 가끔은 발걸음을 멈춰 나를 기다려주면서 깔깔 비눗방울과 같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듣기가 좋기만, 그렇다고 흙투성이 언덕길을 오르는 일이 쉬워지진 않았다. 가끔 꼬마 녀석들과 속도를 맞춰 언덕을 오르는 욕심을 내보지만 번번이 실패한..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아기를 위한 리본 머리끈 내가 준비한 추첨 선물상자 안에는 고작 치약 두 개와 물병 두 개, 그리고 초코파이 몇 개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는 물건을 앞에 놓고 마을 아낙네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국이었다면 그걸 누가 탐을 내겠는가 싶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타루칸 마을에서는 이 물건의 주인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가 퍽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집단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아주머니 세 분이 집중적으로 언쟁을 하고 있었다. 그 언쟁이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부끄러워서 내 옆에서 말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싸우고 있으니 제법 친해지게 된 모양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카무스타(잘 지냈어요)?"라고 물어오면 간신히 "마부티(잘 지냈습니다)"라고..
[필리핀 마닐라 자유여행] '절대로'와 이스코 모레노 도마고소 고백하자면, 나는 혼잡한 곳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그냥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산토 니뇨 축제 따위에 가면 너무 북적인다고 불평을 해보기도 하지만, 내심 좀 복잡하면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마닐라 특유의 지저분함과 북적댐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꽤 사랑하고 있었다. 좀 병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물건을 정리하는 주제에 주변 사물이 두서없이 늘어서 있는 것을 좋아하는 이 모순적인 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뭔가 재밌는 것을 볼 기회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뭐든 상대적이니까 그런 것이지만 나의 결점 따위는 매우 사소하게 여겨진다고 할까. 아니면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존재가 있다는 안..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다그다그(dagdag)가 있는 빵집 "안녕! 나 왔어!""어, 앤이다!" 한 달 만의 방문이었지만, 아이는 내 이름을 정겹게 불러주었다. 빵을 사러 갈 때마다 안에서 빵을 굽던 꾸야가 바깥으로 나와 나를 보면서 빙글빙글 웃는 것을 봐서는 나처럼 매달 와서 빵을 모두 사 가버리는 외국인 손님이 또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아이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고마웠다. 아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갓 구운 판데살 빵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빵을 많이 사려나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스스로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신통하게 여겨질 정도로 어린 꼬마 녀석들까지 기꺼이 어른들 일을 돕는 곳이 산타 줄리아나 마을이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또 크면 큰 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두..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타루칸 마을의 패셔니스타 필리핀은 일 년 내내 덥다고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울 코트를 입지 말라는 법은 없다. 패션은 개인의 자존심이니, 타루칸 마을에도 멋쟁이는 존재한다. 내가 사다 준 거울이니 머리끈은 라면이나 빵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호응이 좋았다. 타루칸 마을에서 옷을 대충 입었다고 흉볼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한껏 멋을 부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연말이었고 나는 뭔가 괜찮은 것을 사고 싶었다. 슈퍼 매대를 두 바퀴나 돌고 고민하다 고른 것은 세숫비누와 빨랫비누, 그리고 매직사랍이란 조미료이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에서 보내준 원고료를 손에 들고 그 금액에 맞추고자 꽤 고민하며 고른 것이다. 초코파이를 사두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하여 빵집에 가서 빵을 한가득 사고, 빵집..
[필리핀 마닐라] 마카티 SM 슈퍼마켓에서 라면을 대량구매 하면 2050년이 되면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많을 것이라고 경고를 들으면 플라스틱과 일회용품을 덜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실행은 말처럼 쉽지 않다. 텀블러며 장바구니 따위야 늘 챙겨 다니고 있지만, 비닐봉지 사용을 완전히 멈추기란 쉽지 않다. 생선이며 육류를 살 때면 비닐봉지가 동원되지 않을 수 없다. 가게에 식료품 운반을 위한 그릇을 들고 가서 담아달라고 하면 된다고 듣기는 했지만, 언제 시장에 가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늘 적당한 그릇을 챙겨서 다니기란 힘든 노릇이다. 개인적으로는 필리핀에서 진행되는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에 찬성하면서도 좀 불만이다. 환경보호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찬성이지만 대뜸 플라스틱 금지정책(plastic ban)부터 만들어 놓고 별다른 환경교육도 없이 ..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로사 파파의 그린 파파야 수프 (아이따족 원주민 집구경) 뭐든 자주 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타루칸 마을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군사 훈련이 있다고 마을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면 할 일이 없어 빈둥대기 일쑤였지만, 요즘 나는 군사 훈련이 있다고 하면 바로 로사네 집에 쪼르르 가버린다. 아이들 노는 것도 보고, 어슬렁대며 마을 사람들 집도 구경하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말랑한 뱃살을 만질 기회도 얻는다. 쌀을 가져다주어도 시원찮을 판이지만, 밥도 얻어먹는다. 일전에 사다 준 소금이며 설탕을 다 먹었을지 궁금하여 앞집 부엌에 들어갔는데, 로사와 꼬마 녀석들이 동네 안내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나의 방문을 사진 촬영의 기회로 여겼다. 때아닌 가족사진 촬영이 힘들어서 집 구경을 그만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로사가 꽤 신난 모습이라 잠자코 함께..
[필리핀 피나투보 자유여행] 아이따족 꼬마 아이들의 구슬치기 남들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나에게만 중요한 날이 있다. 바로 나의 멋진 생일이다. 하긴, 필리핀 사람만큼은 중요하게 여기지는 못한다. 세상에 필리핀 사람만큼 자기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으니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생일 파티를 하겠다고 대출까지 받는 사람들이 필리핀 사람들이다. 필리핀에 사는 인도 사람들이 주로 하는 활동 중 하나가 '붐바이 파이브 씩스 론(bombay 5-6 loan)'라고 부르는 일수놀이인데, 1,000페소를 빌리면 1,200페소를 갚아야 하는 식의 고리대금업이다. 이자가 상당히 비싸지만 필리핀 사람들이 붐바이의 돈을 쓰는 것은 대출받기가 은행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인도사람 돈은 갚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알려져 있고 ..